1편에 이어 영화 김씨표류기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밤섬
조선시대 밤섬은 사람이 사는 유인도였다. 배를 만드는 조선공들이 살았고, 뽕나무밭이 있었으며,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홍수 예방, 여의도 개발할 골자 확보를 명분으로 폭파되었으며 수 백 명이 실향민이 되었다.
그러나 폭파된 섬 자리에 강물의 퇴적물이 쌓이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걸쳐 모래 위로 풀과 버드나무가 자라면서, 밤섬은 폭파 전보다 더 큰 섬으로 복원되었다. 사람이 들어가지 않은 덕에 철새가 모여드는 둥 생태계는 풍부해졌다. 1999년 서울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12년에는 도심 한복판의 습지로는 이례적으로 람사르 습지에 등재되었다.
현재 일반인의 출입은 통제된 밤섬과 주인공의 인생은 궤적이 비슷하다. 그는 슬롯에 의해 부서졌고, 버려졌으며,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에 스스로 회복한다. 개발이 만들어낸 폐허가 스스로 생태계를 복원했듯, 경쟁 슬롯가 배출한 낙오자가 그 슬롯의 규칙 바깥에서 삶을 재건한다.
짜장면 한 그릇
섬에 도착한 남자는 어느 날 짜장 라면 수프 봉지를 발견한다. 면이 없다. 그는 새똥에 섞여 온 옥수수 씨앗이 싹을 틔우자, 그것을 길러 면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밭을 일구고, 새를 쫓고, 수확하고, 절구로 빻고, 반죽하고, 면을 뽑는다.
이 과정에 수개월이 걸린다. 마침내 그가 자기 손으로 만든 짜장면을 앞에 놓고 우는 장면은 한국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대목이다. 짜장면은 한국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1. 가장 값싼 외식 중 하나 2. 졸업식, 입학식, 이사하는 날 먹는 기념일의 음식 3. 한국의 배달 문화가 짜장면을 파는 중국집에서 시작되었다.
이 세 번째 의미가 영화의 핵심이다. 한국에서 짜장면은 '주문하면 오는 음식'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주소도 없고 전화도 없어 주문할 수 없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편리한 배달 시스템을 갖춘 나라에 살면서, 가장 흔한 음식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몇 달간 농사를 지어야 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고립의 정의다. 고립이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있는데 나만 접근할 수 없는 상태다. 강 건너에는 중국집이 수백 곳 있다. 그는 그 불빛을 매일 본다. 동시에 짜장면은 희망의 은유이다. 그가 죽음을 포기한 이유는 그저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사소한 욕망이었다. 그는 한 그릇의 짜장면을 자기 노동으로 얻어내는 과정에서, 그는 슬롯가 빼앗아 간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는다.
1. HELP → HELLO. 남자는 처음 섬의 모래밭에 커다랗게 "HELP"라고 쓰며 구조 요청을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삶이 자리를 잡은 뒤, 그는 그 글자를 지우고 HELLO라고 다시 쓴다. 구조에서 소통으로, 탈출에서 관계로 목표가 이동한 것이다. 영화의 주제를 한 컷으로 압축한 장면이다.
2. 오리보트. 그가 임시 거처로 삼는 것은 강에 버려진 관광용 페달보트다. 도시가 폐기한 오락 기구가 낙오자의 집이 된다. 버려진 것들끼리의 연대다.
3. 달. 여자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지 않은 곳으로 달을 찍는다. 영어 제목 Castaway on the Moon은 여기서 나왔다. 그녀에게 남자가 있는 섬은 지구상의 장소가 아니라 또 하나의 달이다.
4. 민방위 훈련. 여자가 1년에 몇 번, 정해진 날에만 밖으로 나온다는 설정은 한국의 민방위 훈련 제도와 연결된다. 사이렌이 울리면 차량이 멈추고 사람들이 건물 안으로 대피해 거리가 텅 비는 시간. 도시가 잠시 무인 상태가 되는 그 짧은 순간에만, 그녀는 밖에 존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왜 꾸준히 회자될까?
한국에서 실패한 이 영화가 해외에서 살아남은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문화 현상이다.
2009년 하와이국제영화제에서 NETPAC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독창적 각본과 능숙한 연출, 그리고 자본주의가 인간성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부드럽지만 강력한 비판을 수상 이유로 들었다. 서구 심사위원들이 이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자본주의 비판으로 읽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듬해 우디네 극동영화제에서 관객상과 흑룡관객상을 동시에 받았다. 5점 만점 관객 투표에서 4.70점이라는 사실상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였다. 같은 해 뉴욕아시안영화제 관객상, 판타지아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이 이어졌다. 전문 심사위원과 일반 관객이 동시에 반응한 드문 사례다.
일반 관객의 반응과 팬데믹
정작 이 영화를 컬트로 만든 것은 평론이 아니라 일반 관객이었다. IMDb와 레터박스드에는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인류에 대한 희망을 되찾았다" 같은 리뷰가 십 년 넘게 축적되었다.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일본어 리뷰가 뒤섞여 있다.
결정적 전환점은 2020~2021년이었다. 팬데믹 봉쇄로 전 세계가 강제적 고립을 경험하면서, 이 영화는 갑자기 시의성을 얻었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 여자,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남자, 창 너머로만 이루어지는 관계는 2009년에 특수한 설정이었던 것이 2020년에는 보편적 경험이 되었다. 로튼토마토 관객 점수 93%는 이 시기에 재발견되었다.
『캐스트 어웨이』와의 차이
영어 제목 때문에 서구 관객은 톰 행크스의 『캐스트 어웨이』(2000)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로 본 관객들은 두 영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차이는 아래 세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무인도의 위치. 『캐스트 어웨이』의 섬은 문명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김씨 표류기』의 섬은 문명 한가운데 있다. 전자의 고립은 물리적 사고의 결과이고, 후자의 고립은 슬롯 구조의 산물이다. 또한, 남자가 구조되지 못하는 이유가 거리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둘째, 서사의 목표. 톰 행크스의 인물은 탈출을 원한다. 김씨는 어느 시점부터 탈출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짜장면이고, 나중에는 자신을 봐주는 한 사람이다.
셋째, 관계의 존재. 『캐스트 어웨이』가 한 인간의 고독을 그린다면, 『김씨 표류기』는 두 고독의 조우를 그린다. 배구공 윌슨은 상상의 친구이지만, 여자 김씨는 실재하며 답장을 보낸다. 서구 관객들이 이 영화를 오히려 던컨 존스의 『문(Moon)』이나 숀 펜의 『인투 더 와일드』와 비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권에 따라 갈리는 해석
개인주의 문화권의 관객은 이 영화를 소비주의 비판, 문명으로부터의 이탈, 자아 발견의 우화로 읽는 경향이 있다. 도시를 떠나 자연에서 스스로를 되찾는 서사는 소로의 『월든』부터 이어지는 익숙한 계보 위에 놓인다. 하와이영화제 심사평의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표현도 이 독법에 가깝다.
동아시아 관객은 다른 지점에 반응한다. 이들에게 이 영화는 자연 예찬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다. 남자가 섬에서 얻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기를 봐주는 시선이며, 여자가 방에서 나오는 것은 자립이 아니라 접속이다. 집단으로부터의 이탈이 곧 소멸을 의미하는 슬롯에서, 구원은 홀로 서는 데 있지 않고 다시 연결되는 데 있다.
지금 다시 보는 『김씨 표류기』
개봉 17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가 그린 문제들은 완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심화되었다. 한국의 1인 가구 비율은 전체 가구의 약 3분의 1을 넘어섰다. 혼자 살고, 혼자 먹고, 혼자 죽는 사람이 늘었다. 고독사는 이제 통계 항목이자 정바카라 용어가 되었다. 한국의 자살률은 2024년 다시 상승해 201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립·은둔 청년 지원 정바카라은 이제 겨우 시작 단계다.
동시에 이 영화가 그린 도구들은 낡았다. 싸이월드는 사라졌고, 미니홈피는 인스타그램 릴스가 되었다. 영화 설정인 유리병 편지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편집해 전시하고, 강 건너의 삶을 관찰하며, 정작 옆 사람의 이름은 모른다.
맺으며
『김씨 표류기』는 한국 슬롯를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다. 감독은 통계를 들이대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대신 옥수수를 심고, 면을 뽑고, 모래에 글자를 쓴다. 그러나 바로 그 담담함이 이 영화에 더 빠져들게 만든다.
자살률 1위, 세계 최저 출산율, OECD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 같은 지표들은 독자에게 숫자로만 남는다. 이 영화는 그 숫자들이 한 사람의 하루로 번역되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다리 위에 서는 일이고, 커튼을 치고 사는 일이고, 짜장면 한 그릇을 위해 몇 달을 견디는 일이다. 한국을 이해하고 싶다면 K-팝의 화려함이나 K-드라마의 로맨스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성취를 만들어낸 압축 성장의 속도가 동시에 무엇을 부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밤섬이 그랬듯이. 그리고 밤섬이 그랬듯이, 부서진 자리에서 무언가가 다시 자란다는 것도. 영화의 마지막, 남자가 모래에 새로 쓴 글자는 "HELP"가 아니라 "HELLO"였다. 살려달라는 말이 아니라, 안녕이라는 인사. 한국 슬롯가 고립된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문장이 있다면 아마 그 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