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중복 0774 중복을 먹거리가 아닌 것으로 적절하게 보낼 궁리를 하다가 머리를 깎았다. 수시로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쳐달라고 가볍게 주문했는데 머리 감으러 이동할 때 내려다보니 바닥이 까맣게 수북하다. 온통 번뇌처럼 보인다. 무성하게 고민들이 자라나 가늘게 은폐했구나. 거울을 가장 오래 바라보는 시간이다. 머리를 보라는 건데 오로지 내 표정만 응시한다. 수시로 어색하다. 내 표정이 디자이너의 가위질보다 다양하다니! 이때 웃기는 상상을 하면 안 된다. 멈출 수 없다. 목에 두른 가운을 뒤집어 얼굴을 가릴 수도 없다. 참기 위해 어금니를 물고 과장되게 인상을 쓴다. 캥거루를 생각하지 말아야지. 왜 이 순간 생전에 본 적도 없는 캥거루 일가족이 내게로 달려든다. 그 주머니에 코알라가 들어있을 게 뭐람. 머리를 하고 일하러 가시나요? 침묵하던 디자이너의 아이스브레이킹 첫마디가 설마 당신 백수냐는 에두른 물음이다. 영화 보러 갈 건데요. 그렇다고 했으면 짧을 얘기가 올해 백 세 번째 영화예요 궁금해하지도 않을 부가설명이 안쓰럽다. 업무처럼 바르게 앉아 마블 영화를 보고 나오니 영화 장면과 아까 대화들이 중복되어 떠오른다. 레이어드 된 것들은 언제나 은밀하고 신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