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꽃을 숨긴 채 익어가는 달콤한 생존법

무화과가 조금씩 익어가듯 햇살과 바람도 차츰 달라지겠지

by이른아침

주택가 골목을 걷다가 담장 위로 고개를 내민 나무 앞에서 멈췄다. 손바닥처럼 깊게 갈라진 잎 사이로 동그란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초록빛 열매는 잎과 색깔이 같아 잘 보이지 않았으나 한두 개가 불그레 익어가고 있었다. 무화과나무였다.


<담장 너머로 자란 나무에서 익어가는 무화과>

여전히 한낮의 햇볕은 뜨겁고 매미 소리도 기세를 꺾지 않았다. 짧은 골목길을 걷는데도 이마와 등에 땀이 송골송골했다. 하지만 익어가는 무화과 열매를 보자 길고 무덥던 여름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계절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린 것은 식물이었으니까.


무화과가 익어가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고향집 텃밭에도 한그루가 있었다. 무성한 가지를 다듬어주면 다음 해에는 굵게 자랐고 여름이면 가지마다 무화과가 여물어갔다. 늦여름에 영암 지역을 여행할 때면 도로변에서 무화과를 파는 모습도 더러 보았다. 간이 판매대에 무화과가 담긴 상자를 차창 너머로 보면서 남도의 늦여름을 느꼈다.


대전 성심당에서는 케이크 위에 제철 과일을 얹은 시루케익을 계절마다 내놓는다. 올해도 8월 하순부터 무화과를 올린 무화과시루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멜론이나 망고시루에 이어 무화과시루가 출시되면 여름은 어느덧 끝을 향해 간다고 볼 수 있다.


<한 그루에서 다른 속도로 익어가는 무화과><더디게 익어가는 이웃집 무화과>


골목 담장 너머에 있는 무화과를 사진으로 찍고 있었다. 익어가는 것을 찍으려고 발꿈치를 들고 팔을 뻗었다. 그 순간 대문이 벌컥 열렸다. 놀라 손을 급히 거두었다. 담장 너머 무화과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으니, 열매를 따려는 행동과 다름없었다. 문밖으로 나오는 집주인 아저씨의 경계 어린 눈초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대전 도심에서 보기 드문 무화과가 익어가고 있어서 사진을 찍는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옆집의 무화과는 작고 아직 익지 않았어요. 따로 관리하시나 봅니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그제야 경계를 늦추며 말했다.


“아니에요. 별로 해주는 것도 없어요. 그냥 두어도 잘 자라고 열매도 많이 달려요.”


그는 무화과나무에 거름을 주지 않고 겨울에도 특별히 보온하지 않는다고 했다. 열매는 다른 과일과 달리 한꺼번에 익지 않고 가을까지 시차를 두고 차례대로 익어가므로 하나씩 따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가지마다 달린 무화과를 보니 ‘그냥 둔다’라는 말이 선뜻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잘 익은 무화과 하나를 따서 내 손에 건네주었다. 열매꼭지에 하얀 유액이 맺힌 싱싱한 무화과였다. 반으로 쪼개 입에 넣자 은근한 향이 퍼지고 씨앗 같은 알갱이들이 씹혔다. 어렸을 적 고향집에서는 물컹한 식감도 심심한 단맛도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골목에서 맛본 무화과는 기억 속의 맛과 달랐다. 늦여름의 향과 단맛이 차 있었다.


<무화과 꼭지에서 흘러나오는 유액>


무화과는 한자로 ‘無花果’, 꽃이 없는 열매라는 뜻이다. 제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 나무들과 달리 무화과나무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꽃다운 꽃을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정말 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화과는 꽃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겉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꽃이 피지 않은 채 열매가 달린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대부분의 식물은 꽃을 화려하게 드러내 꽃가루받이 곤충을 불러들이는 데 비해 무화과는 반대되는 선택을 했다. 꽃을 주머니처럼 생긴 꽃받침 안에 숨겨 놓았다. 꽃들이 주머니 안에 있으니 언제 닥칠지 모를 비바람이나 건조한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받기에 유리했을 것이다. 이렇게 무화과는 다른 방식으로 꽃과 씨앗을 지켜왔다.


그렇다고 꽃이 바깥세상과 단절된 것은 아니다. 무화과 끝에 배꼽 같은 작은 구멍이 있다. 이곳은 닫힌 꽃주머니와 세상을 이어주는 문이다. 무화과좀벌이 이 문을 비집고 들어가 꽃가루를 옮긴다. 대신 무화과는 좀벌이 안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를 공간을 제공한다. 서로의 삶을 이어주는 공생 관계다.


윌리엄 C. 버저는 그의 바카라 <꽃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을까?>(130쪽)에서 이들의 공생 방식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생존을 단 하나의 곤충 종에 의존하는 것이 위험해 보이지만 무화과나무는 700종 이상의 종류를 가질 만큼 성공한 식물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작년 5월에 <무화과 겨울재배 매뉴얼>을 발간한 전남농업기술원의 연구사도 이들만의 독특한 공생 관계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동행은 국내 과수원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기보다 무화과의 고향에서 이어온 생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재배되는 품종은 꽃가루받이 없이도 열매를 키우는 단위결실성이라 좀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국내에 무화과좀벌이 존재한다는 명확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다.


무화과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도 가지고 있다. 가지나 잎, 덜 익은 열매에 상처가 나면 흰 유액이 나온다. 집주인이 내게 무화과를 따줄 때 흘러나왔던 그 액체다. 상추나 고들빼기를 자르면 나오는 유액과 같다. 유액은 상처 부위를 막아 오염을 막고 곤충이나 초식동물이 함부로 먹지 못하게 하는 방어 수단이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자란다는 집주인의 말 뒤에는 수만 년 동안 살아온 나름의 생존 전략이 숨어 있었다.


덜 익었을 때는 강한 유액으로 열매를 보호하다가, 익어가면서 과육이 부드럽고 달콤해져 새와 동물을 불러들인다. 사람도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로변 판매대 옆에 차를 세우고, 빵집 앞에 줄을 서서 무화과가 올라간 케이크를 기다린다.


다시 담장 위를 올려다보았다. 정오에 가까워 오자 햇살은 더 눈부셨다. 무화과는 넓은 잎 사이로 햇살을 받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을 견디며 조금씩 익어갈 것이다. 집주인의 말처럼, 한꺼번에 익지 않고 가을까지 하나씩 익어갈 것이다. 무화과가 조금씩, 하나씩 익어가듯 해는 하루하루 짧아지고 바람결은 아침저녁으로 달라지겠지.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덕유산, 서늘한 바람과 만발한 여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