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면서 더 엎드리기로 했다
저수지 가장자리에 개구리밥이 드문드문 떠 있었다. 물은 잔잔했고 개구리밥도 거의 움직이지 않는 듯 보였다. 잠시 뒤 다시 바라보니 처음 있던 자리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물의 흐름에 따라 잎들이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잔잔한 물결을 따라 움직이던 개구리밥은 다른 개체와 닿았다가 떨어졌다. 모이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저수지를 찾은 것은 마름꽃이 피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꽃은 만나지 못했으나 물 위에 떠서 조금씩 자리를 옮기는 개구리밥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움직임이 없었다면 개구리밥의 존재에 눈길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가을에 이 저수지를 찾았을 때도 마름만 보았을 뿐 그 곁에 있던 개구리밥은 보지 못했었다.
어떤 식물인지 자세히 살피려 했으나 손이 닿지 않았다. 손으로 물결을 일으켜 물가 쪽으로 밀려오게 한 뒤 개구리밥 한 포기를 물에서 건졌다. 손톱만 한 작은 잎 두세 개가 붙어 있고 그 아래엔 예닐곱 가닥의 가늘고 긴 뿌리가 촘촘히 아래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개구리밥에 대해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잎처럼 보이는 부분은 잎과 줄기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은 단순한 구조여서 잎이라 부르지 않고 엽상체라고 하였다. 광합성을 하며 잎과 같은 역할을 했다. 윗면은 연녹색인데 뒤집어 보니 아랫면은 자줏빛으로 신비감을 더했다. 엽상체 안에는 공기를 담는 틈들이 발달해 이 공기층이 물 위에 뜰 수 있게 한다는 설명이었다.
또한, 7~8월에 꽃이 핀다고 하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번식은 꽃을 피워 씨앗을 맺기보다 엽상체를 늘리는 영양번식으로 주로 이루어졌다. 둥근 엽상체 두세 개가 서로 붙어 있었는데 어미 엽상체 옆에서 딸 엽상체가 돋아나고 충분히 자라면 분리되는 방식으로 번식했다. 가을이 되면 겨울눈을 만들어 물속으로 가라앉아 월동한 다음, 봄이 되면 다시 떠올라 번식한다는 설명이었다. 작은 몸에 갖춘 생존전략이 제법 야무졌다.
부평초(浮萍草)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앞서 본 것처럼 물 위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는 모습을 정처 없는 삶에 빗댄 이름이었다. 그래서 흔히 개구리밥에는 뿌리가 없을 거라고 짐작하면서, 떠도는 인생을 두고 ‘뿌리 없는 부평초’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개구리밥은 땅에 닿지 않았을 뿐 여러 가닥의 뿌리를 길게 내리고 있었다. 이 뿌리 덕분에 거친 물살을 견디며 뒤집어지는 일이 없이 스스로 중심을 잡는구나 생각되었다.
대부분 식물은 뿌리를 땅에 내리고 한번 자리 잡은 곳에서 평생 살아간다. 저수지에 오는 길에 본 벼는 논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선 채 계절을 버텨낸다. 그러나 개구리밥은 그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한 곳에 자신을 묶어놓는 대신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떠도는 삶을 택했다. 그렇다고 중심까지 잃지 않았다. 뿌리는 땅을 붙잡는 대신 물속으로 드리워져 작은 몸이 수면에서 균형을 잡도록 도왔다. 벼에게 뿌리는 한자리에 머물기 위한 닻이었고 개구리밥에게 뿌리는 움직이는 동안 균형을 잡는 조타수였다.
온라인 게임에서 은퇴하고 육십 중반에 접어들면서 생각과 삶의 방식은 더 고정되었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것들에 편해졌고 가능하면 그 안에서 머무르려 했다. 은퇴 후에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서 보이지 않던 차이도 드러났다. 양말이나 옷을 벗는 사소한 습관부터 반찬의 간을 맞추는 정도와 식사하는 습관까지 많은 것들이 달랐고 눈에 띄었다. 인정하고 넘기면 될 일이었지만 내 잣대로 아내의 행동을 재단하고 있었다.
얼마 전 식탁에서도 그랬다. 아내는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다른 것을 골랐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행동이 그날따라 눈에 거슬렸다. 함께 먹는 음식을 들었다 놓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라고 여겼다. "세 번이나 들었다 놓네"라며 못마땅한 말투로 말했다. 그 말에 아내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내도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곧바로 서운함을 드러냈다. 결혼 초에는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 한다고 핀잔을 주더니 이제는 먹는 것을 고르는 일까지 지적하냐며 토라졌다. 남들과 함께하는 자리도 아니고 삼십 년 넘게 살아온 남편과 마주한 밥상에서까지 엄격해야 하냐고 말했다. 밥맛이 떨어져 더 먹음직스러운 반찬을 찾았을 뿐인데 그마저 흉이냐며 서운해했다. 내 말이 아내에게는 사소한 행동까지 간섭하고 고치려는 투로 들렸을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아내를 지적했지만 정작 아내의 사정과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래 함께 살아온 두 사람만의 밥상에서 내 기준을 엄격하게 들이댈 일도 아니었다. 다른 상황에서도 내 자리를 고집하기보다 아내가 있는 쪽으로 한 걸음만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개구리밥이 뿌리를 내린 채 흐름에 따라 움직이듯 유연할 필요가 있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의 다름을 헤치지 않는 거리가 필요했다. 마음까지 멀어질 만큼 떨어지지 않는 거리를 찾아야 했다.
저수지의 경사진 둑에 비스듬히 앉아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전날 내린 비로 저수지 물은 불어나 있었고 흙탕물이 섞여 탁했다. 온갖 부유물까지 뒤섞여 어지러웠다. 습도는 높았고 햇살은 뜨거웠다. 어느새 이마는 물론 등에도 땀이 맺혀 흘렀다. 개구리밥이 물 위를 천천히 옮겨 다니는 모습을 살피면서도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되었다. 어떻게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화해를 청할지 마음도 복잡했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로는 부족할 듯했다. 아내는 이번 일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두었던 섭섭했던 일들까지 꺼내놓으며 불만을 토로했던 터였다. 사소한 젓가락질을 지적한 말이 그동안 쌓였던 서운함을 건드린 셈이다. 내 말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아내의 서운함을 받아들이고 상한 마음을 다독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전히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수면을 바라보니 눈여겨보았던 개구리밥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었다. 건너편 물가에 흩어져 있던 개구리밥이 한데 모여 무리를 이루었다. 탁했던 물 위로 초록빛이 가득했고 햇볕을 받은 잎들이 잔잔하게 반짝였다.
개구리밥의 야무진 생태를 더 알고 싶다면, 신혜우 박사의 바카라 <식물학자의 노트>에서 "물 위를 떠도는 용기" 편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아울러 개구리밥의 삶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궁금하다면, 가수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를 들어봐도 좋습니다. 살아갈 힘을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 논의 벼에 기대어 살아가는 곤충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