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내 사전에 손녀의 싱싱한 단어가 채워진다
할머니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인 가족들로 집안이 다시 북적인다. 주인공은 할머니보다 두 살과 네 살배기 손녀들이다. 이번에도 두 손녀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문장을 말하는 데 서툴러 보였던 둘째 손녀는 두 개 이상 단어를 조합하여 반듯한 문장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언니보다 늦나 싶었으나 갑자기 말문이 빵 터진 느낌이다.
놀라운 건 큰손녀다. 앞뒤를 이어가며 제 생각을 제법 조리 있게 조잘댄다. 이번 2박 3일간의 외갓집 나들이 동안 내 눈에 비친 큰손녀의 말솜씨는 '꼬마 문장가'라 할 만하다. 아이들의 발달 단계에 맞게 하는 말이고 표현이겠지만 인상적이다. 스스로 느끼고 이해한 세상이 보탬 없이 담겼다.
손녀에게 비친 쑥의 색깔과 맛
금요일 오후에 기차역에서 외갓집으로 오는 길가에 핀 벚꽃을 보고 쑥을 캐러 간다. 평소 동식물에 관심이 많은 큰손녀는 신이 나 앞서 걷고 동생이 뒤따른다. 햇볕이 잘 드는 묘지라 쑥이 다른 곳보다 크고 아이들이 다니기도 편해 맞춤한 장소다. 쭈그려 앉은 내 옆에서 손녀도 쑥을 뜯다가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묻는다.
“할아버지, 쑥이 초록색인데 왜 여기는 흰색이야?”
쑥잎 뒷면에 난 솜털을 놓치지 않고 묻는다. 동물처럼 쑥도 추워서 털옷을 입은 거라고 대답하자 갸우뚱한다. 식물이 옷을 입는다는 게 낯설다는 표정이다. 쑥 뜯기가 어려운지 손녀는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며 할머니와 엄마가 캔 쑥을 모아 담는다. 그마저도 싫증이 나는지 무덤가 주변을 막 깨어난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돌아다닌다. 분홍꽃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인다. 무슨 꽃이냐는 물음에 진달래꽃이라고 답하자. 이름을 되뇌며 꽃잎을 어루만진다.
“와~~ 부드럽다. 할아버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홍색이야.”
저녁을 준비하면서 두 손녀도 싱크대 앞에서 쑥과 채소를 씻는다. 이렇게 요리에 참여하면 즐거워하고 더 맛있게 먹는다. 반찬은 쑥국과 볼락 구이다. 쑥국을 잘 먹을지, 주로 구워주던 조기가 아닌 생소한 볼락이라 어떻게 호응할지 지켜본다. 아무런 반응이 나오지 않자, 할머니는 무슨 맛이냐고 묻는다.
“쑥국은 나뭇잎 맛이야. 고기가 화난 것 같아. 입이랑 눈이.”
실제로 나뭇잎을 먹어보지 않았겠으나 익숙한 음식과 달랐던 모양이다. 낯선 맛일 텐데도 몇 번 더 떠먹는다. 한 번의 신기한 경험이 아니라 훗날 할머니의 맛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본다.
생선의 입과 눈이 손녀에게는 화를 내는 표정으로 보인 듯하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벌어진 입은 금방이라도 거친 말을 쏟아낼 듯했고 감지 않은 눈은 째려보는 듯 나를 향해 있다. 이런 이유로 생선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 손녀도 그 마음일지 모른다. 생명을 먹거리로만 대하는 내 감각이 아이의 맑은 시선 앞에서 멈춰 선다. 손녀에게는 요리라기보다 표정을 가진 생명이었다.
“언니, 똥 싸~”
먼저 잠자리에 드는 동생이 언니를 찾자, 더 놀고 싶은 큰손녀가 동생에게 던진 한마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한다. 녀석들이 엄마를 찾을 때마다 당장 올 수 없는 형편이면 둘러대던 핑계로 "엄마, 똥 싸러 갔어"라고 했다. 그러면 수긍하거나 수그러들던 말이었다. 그런데 큰손녀도 동생에게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녀석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넘아가 주었던 모양이다. 속내를 들킨 거다. 손녀는 말을 배우면서도 어른들의 세상을 읽어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손녀에게 배우는 기다림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 지난여름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이제 제법 능숙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속도를 줄이는 브레이크 사용도, 자연스럽고 방향을 전환하는 핸들 조정도 문제없다. 동생을 뒤에 태우고도 혼자인 듯 자유롭다. 그래서 이제 보조 바퀴를 떼자고 하자.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사실 아직은 보조 바퀴에 의지할 시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녀의 대답이 궁금해 물었던 말이다. 무엇이든 빨리 해야 직성이 풀리는 어른과 다른 여유이다. 그렇지, 보조바퀴를 떼어내는 시기도 네가 정해야지.
꿈같은 주말이 지나고 다시 서울로 가는 날이다. 여느 집이나 그렇듯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짐을 챙기려면 전쟁터가 따로 없다. 서둘러 승용차에 몸을 실은 할머니가 뒷좌석의 딸에게 아이들 잘 챙기라고 확인하자. 큰손녀는 우리가 짐이냐며 능청스럽게 맞장구쳤고 그 말에 웃음바다로 변한다. 운전대를 잡은 내가 정말 모르는 게 없다고 혀를 내둘렀더니, 녀석은 모르는 게 많다며 한술 더 뜬다. 이어 딸이 주말 잘 보내고 간다며 인사를 건넨다. 그러자 또 한마디 보탠다.
“나도 주말이 좋아”
유치원에 가지 않아 좋은 날, 외갓집에 오면 더 즐거운 주말. 그 주말을 기다리는 손녀의 마음이 전해진다. 너희가 채워줄 싱싱한 단어들로 가득할, 언제일지 모를 다음 주말이 할아버지도 좋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