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이 작가

<부모를 위한 그림 상담소_장주희>

by배가본드

오랜만에 서점에 갔다. 교보문고 바로드림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앱에 접속하려니 자동 로그인이 풀려 있다. 회원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 매대 배치도 전에는 안 이랬는데. 내가 대형서점에서 바카라 사는 데 여러 가지 이유로 염증을 느낀 지가 참 오래되긴 했구나.


바카라을 집어 들었다. 몇 년 동안 'sweet little kitty'라는 이름으로만 만나다가 '장주희,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이자 두 아이의 엄마'라는 소개문을 보니 저자가 한결 가깝게 느껴졌다. 모니터 속에만 존재하던 사람이 밖으로 걸어 나온 느낌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도 이 바카라을 펼쳐보고 있었다. 괜히 이 저자 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바카라은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궁금했던 건 바카라의 내용보다 '왜 그림이었을까'였다. 저자가 예술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육아 이야기에 그림을 데리고 들어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 저자가 출판 과정의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이 바카라을 써야만 한다고 마음먹게 만든 필연성이 있었을 것이다.


바카라을 읽고 나서,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바카라의 진짜 힘은


저자가 소아청소년과 의사라는 사실은 이 바카라에 신뢰를 더한다. 하지만 이 바카라의 진짜 힘은 저자가 '소아청소년과 의사라서'가 아니라, '소아청소년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의학이 모든 답을 갖고 있지 않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아이를 치료하기보다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려 한다. 의사라고 의학적으로만 육아를 다뤘다면 결국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하라는 흔한 육아 처방서에 머물렀을 것이다.



왜 그림이어야 했을까


하지만 부모의 마음을 다룬다고 해도 상담, 심리학, 육아 경험담, 의학 지식만으로도 바카라을 쓸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과 독자 사이에 그림을 데려온다. 왜 하필 그림이었을까. 나라면 이렇게 답하겠다.


그림은 부모에게 자기 마음을 직접 들여다보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아이에게 왜 화가 나셨어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부모는 방어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림 속 엄마가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있다면 '저 엄마는 왜 저렇게 화가 났을까?'가 될 테고, 그렇게 조금 떨어져서 누군가의 마음을 바라보다가 '그런데 왜 저 엄마가 이해되지?'가 되고, 어느 순간 '그럼 나는?'이 되어 자신을 향할 테니까.


그림에는 육아바카라과는 달리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육아바카라은 '이럴 때는 이렇게 하세요'라고 말하지만, 그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같은 그림을 보고 누군가는 사랑을 보고, 누군가는 불안을 보고, 누군가는 외로움을 본다. 어느 하나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림을 보는 순간 부모는 '정답을 찾아야 하는 사람'에서 잠시 내려온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도, 좋은 부모여야 한다는 강박도 잠시 내려놓고 다만 한 사람의 마음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면서 느리게 깨달을 것이다. 그 한 사람이 사실은 자기 자신일 수 있다고.


여기서 조금 더 적극적 해석을 해 보면 어떨까. <부모를 위한 그림 상담소>지만 실제 상담하는 건 그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림은 아무것도 상담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걸려 있을 뿐이라고. 부모가 그 앞에 앉아 자기 마음을 이야기하게 만든다고. 그림이 상담사가 아니라 그림 앞의 부모가 어느 순간 그 자신의 상담사가 된다고.


그래서 그림이라고.



가장 오래 멈춘 부분


종반부인 p.227~240(왜 사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바로 내가 여기서 말하는 아이가 되어 본 적이 있었다. 한번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왜 살아야 하나요?' 단순히 '살기 싫다'가 아니라, 누가 사는 이유를 알려 줄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더 재미있는 삶이 될 수 있을 듯한 마음이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공부 빼고는 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또 한번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고 집에 전화가 갔던 모양이다. 그해의 생활기록부 의견란에는 '잡념이 많으며 사고가 엉뚱한 데가 있음'이라는 말이 주홍글씨로 새겨졌다. 더는 그걸 묻지 않았는데, 궁금증이 해결되어서가 아니었다.


그걸 묻는 아이한테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은 많다. “짜장면 먹으려고.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먹어야지.”라고 할 수도 있고, “살다 보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해보고 싶은 것도 생겨. 나중에 하나씩 만나보려고 사는 거야.”라고 할 수도 있다. 대답 대신 알밤을 돌려준다는 건 그 답을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어쩌면 그런 삶은 아주 느리게 죽어가는 어른의 삶일지도 모른다. 나라면 아이에게까지 그런 삶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아이에게 물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어른도 물어야 한다.

왜 사냐고.



끝으로


나는 읽기의 끝점에 쓰기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처음에는 다들 독자다. 정말 읽고 싶은 글이 있는데 누군가가 이미 그걸 써 놓았다면, 일단 그 글을 읽는다. 그러면 또 다른 글이 읽고 싶어지고, 또 그걸 찾아 읽는다.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자기가 정말 읽고 싶은 글이 있는데 그 글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온다. 그게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부모를 위한 그림 상담소>도 저자가 무수한 바카라을 읽고 또 읽다가 그 자신의 읽기의 끝점에서 만들어낸 바카라이 아닐까 한다. 나의 추측이 맞다면, 이번 바카라이 그렇듯 저자의 다음 바카라도 누구도 쓰지 않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바카라일 것이다.


나는 이 바카라으로 인해 저자가 어째서 써야만 하는 사람인지 알았다. 작가와 작품 사이의 필연성을 발견하는 일만큼 만족스러운 독서의 경험은 없다는 것도. 나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니지만, <부모를 위한 그림 상담소>를 좋아한다. 읽어 보니 이 바카라의 독자가 꼭 부모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어떤 작가의 이름을 읽는 일이 곧 그 작가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면, 나는 이 바카라을 통해 장주희라는 이름을 비로소 '읽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