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와 제국주의

공부 (15화부터 19화까지 보완자료)

by박재한

- 근대와 제국주의

근대에 대한 정의를 하는 것에 있어서 많은 논의와 이론과 주장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이론들과 논리들을 포괄하는 거대한 공통적인 담론은 정치적 근대화로 대표되는 민주화와 경제적 근대화로 일컬어지는 산업화를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다윈의 진화론을 본떠 만든 스펜서의 슬롯진화론이 당시 대중세를 띠며, 유럽 슬롯는 근대화를 겪게 된다. 한편 누가먼저 근대화를 선점할 것이냐는 목표를 놓고 경쟁하는 유럽 열강들은 자국의 국력을 향상하는 방안으로 강력한 산업화를 정바카라적 어젠다로 추진하게 되었고, 이제 이들은 자국의 시장을 넓히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식민지를 갖게 되면 식민지 시민들의 값싼 노동력을 수취할 수 있고, 식민지에 위치한 저렴한 식량과 자원을 강탈할 수 있다. (물론 아주 합법이라는 탈을 쓰고 강탈했다는 점은 안 비밀이다.)


- 탈아입구의 일본

한편 일본은 세계를 야만, 반개, 문명으로 구분하고 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가 반개, 서구 열강이 문명국이며 일본은 반개에서 문명국으로 가기 위해 작금의 동아시아적 물질, 정신을 모두 버리고 유럽 열강으로 가야 한다는 '탈아입구'적 정바카라을 취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론에서 언급된다.)


문명개화론을 비롯한 탈아입구적 정신을 무장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다. 물론 이들은 정치적 근대화인 민주화보다는 경제적 근대화인 산업화에 온정신을 집중하여 근대화를 이륙했다. 유럽 제국주의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기치로 근대화를 이륙해서 그런지 국가가 중심이 된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이륙했고,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근대화를 성공한 일본은 이제 값싼 원료와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 필요해졌다. 산업화와 도시인구의 증가는 농촌 인구의 감소와 1차 생산물 감소라는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일본은 주변으로 시각을 돌렸다. 그러던 중 조선이 눈에 들어왔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단계를 차근차근 밟게 된다.


- 무단통치

무단통치의 무단은 무력에 의한 결단을 의미한다. 즉 합의 없는 일방적 통치를 무단통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초기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했을 당시, 많은 의병과 불복종이 있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기에 더더욱 저항은 거셌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은 가혹하게 무력을 탄압했다. 식민지 조선은 초기 10년간은 천황에 직접 예속한 조선총독에 의한 통치를 받았다. 각별히 식민지로서 통치를 받음으로써 가혹하게 탄압당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군사경찰인 헌병이 민간슬롯 경찰 업무를 겸임했다. 또한 전역 2천여 곳에 헌병 1만에서 1만 5천 명을 배치했다. 또한 치안, 첩보, 징세 등 조선인의 일상생활 전체를 헌병이 직접 통제하였으며, 경범죄에 대해서는 범죄 즉 결례에 의거하여 즉시 처벌했다. 또한 조선태형령을 제정하여 조선인에 한해서는 태형으로 다스렸다.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당시 조선의 분위기와 시대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목표는 조선의 근대화였다. 식민지의 합리화 수단으로써 근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들은 철도와 통신망을 깔고,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으며, 경제와 행정의 근대적 법령을 제정했다. 망한 제국이었던 대한제국과는 결이 다른 인프라가 마구잡이로 들어왔다. 단순히 인프라가 들어온다고 하는 것만 보았을 때 좋아 보일 수가 있으나, 실상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철도와 통신망 건설은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또한 한반도를 훨씬 용이하게 지배하기 위해 인프라를 깔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이전까지 인정되었던 소작이라는 재산을 무효화했고, 불명확한 토지는 조선총독부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귀속시켜 값싸게 일본인들에게 팔았다. 또한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손쉽게 만들기 위해, 합법적으로 폭력적 통치를 할 수 있게 근대적 법령을 제정했다고 보는 것이 지극히 일반론적인 관점일 것이다.


- 문화통치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내 제국주의 경쟁은 종말을 고했다. 누가 더 우위에 서있는지를 경쟁하다 수천만 명이 죽게 되는 참극을 겪게 되니 이만큼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태는 역사에서 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기존 열강들과는 다르게 신흥 열강 미국, 소련, 일본이 등장했다. 이들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승전국의 위치에 서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해체하고 패전국의 제국을 찢었다. 그중 독일을 산산조각 냄과 동시에 막대한 부채를 떠 앉게 하니 독일은 향후 자력갱생할 가능성이 거의 희박해졌다.


한편 일본에서는 1919년 3.1 운동으로 촉발된 민족적 저항에 부딪쳤다. 이로 인하여 9년 가까이 이루어졌던 헌병경찰의 통치, 가혹한 통치가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일본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조선을 효율적이게 억압하고 복종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 중 나왔던 정답이 바롤 문화통치, 동화통치였다.


신임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고토 조선총독부 총독은 해군 대장 출신이었다. 그는 조선인이 스스로 일본 국민으로 느낄 수 있도록 통치 방침을 완화시켰다. 가령 군인이 아닌 자를 총독으로 임명하겠다던가, 헌병경찰제와 조선태형령을 폐지하겠다던가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채택하는 대신 경찰의 수를 배로 늘린다는 꼼수가 있다. 또한 이들은 정치적 자유의 일부를 해소시켜 줬다. 특히 언론, 출판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해 줬는데 이때 탄생한 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이다.


또한 투표권도 부여했다. 지방행정에 자문기구를 설치하였다. 명칭은 도평의회, 부면협의회다. 의결기능은 없지만 자문기능은 부여했다. 투표권은 25세 성인 남성 중 일정액 납세자에 한해서 투표권을 부여했다. 잘 생각해 보자. 1920년 25세 성인 남성 중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한 자는 몇 명이나 될까? 그것도 부나 면과 같은 아주 작은 지역에서 말이다...


- 말살통치

1929년 10월 29일, 속칭 검은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이 날은 세계 경제사의 한 획을 긋는 날이었다. 당시 세계적인 규모의 자산시장이 돌아가던 미국 월스트리트 주식시장의 대폭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유야 수많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경제의 과잉투자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라 수요는 다시 줄어들었는데, 전쟁으로 막대한 공급이 팽창하다 보니 서로의 균일점을 찾지 못한 까닭이라. 이로 인하여 1929년부터 대체로 1939년까지 전 세계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겪게 된다.


미국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바카라을 실시했다. 소위 후버댐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건설은 이때 이루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 경제권을 강화함으로써 대공황을 피하려고 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식민지를 확보하며 대공황을 해결하려고 하였고, 소련의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하며 대공황을 피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전쟁으로 확대된 자국의 공급과잉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을 만들거나 시장을 강제로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대외침략을 통한 경제 위기 극복을 시도했다.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1932년 위성국가인 만주국을 건설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벌였으며,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화했다.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동남아 침략, 태평양 침략, 태평양전쟁을 벌였다. 한편 유럽에서는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던 독일이 독일우선주의를 앞세운 히틀러를 중심으로 나치 제국을 건설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세계대전이 다시 발발하게 된다. (1931-1945)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건 뭘까? 바로 사람이다. 일본은 전쟁을 벌이며 인력난에 시달렸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의 청년을 징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여 인력, 물적 자원을 전부 뜯어갔다. 더불어 황국신민화정바카라을 실시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말살하고, 황국 신민을 육성하려고 노력했다. 이 중에는 전시경제 통폐합, 언론 통폐합, 조선어 금지, 신사참배 강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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