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올트먼이라는 렌즈로 본 AI의 가치전쟁

그리고 기후운동이 이 장면을 낯설게 볼 수 없는 이유

by김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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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헝싱의 '샘 올트먼: AI 제국의 설계자'를 읽으며 이 글을 쓴다>


이 바카라은 샘 올트먼을 단순히 챗GPT를 만든 회사의 CEO로 다루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프로그래머, 실리콘밸리의 대표 기업들을 길러낸 벤처캐피털 Y Combinator의 권력자, OpenAI의 설계자, 그리고 2023년 11월 ‘해고된 CEO’로 세계 언론의 중심에 섰던 인물까지 한 사람의 궤적을 따라간다. 바카라의 흥미로운 지점은 올트먼을 영웅이나 문제아로 단순화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AI의 위험을 말하면서도 더 빠른 개발을 밀어붙이고, 공익을 말하면서도 거대한 자본과 결합하는 인물이다. 바로 그 모순이 이 바카라의 핵심이다.


이 바카라을 읽고 나면 AI 붐이 단순한 기술 유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AI 산업은 실리콘밸리 내부에서 오래전 형성돼 여전히 진행 중인 철학적·윤리적·준종교적 논쟁의 결과물에 가깝다. 겉으로는 모델 성능, 투자 규모, GPU, 제품 출시 경쟁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훨씬 오래된 질문이 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기술을 더 빨리 밀어붙여야 하는가. 아니면 바로 그 속도를 의심하고 통제해야 하는가.


그 논쟁의 한 축에는 이타주의가 있다. 이타주의라는 말은 프랑스어 altruisme에서 왔고, 라틴어 alter, 곧 ‘타자’라는 뜻과 연결된다. 19세기 오귀스트 콩트가 이기주의의 반대말로 사용한 개념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서 말하는 이타주의는 일반적인 선행이나 착한 마음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효율적 이타주의’, 즉 Effective Altruism이다. 이것은 감정적 선의보다 증거와 이성을 통해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줄 수 있는가”를 따지는 철학이자 운동이다. 공리주의에 그 의미가 맞닿는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처음에는 기부, 빈곤, 보건, 동물복지 같은 주제와 가까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AI 안전, 팬데믹, 생물안보, 핵위험, 미래세대 같은 문제로 확장되었다. 특히 장기주의와 결합하면서 질문은 더 커졌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도 도덕적으로 중요하고, 그 미래가 매우 클 수 있으며, 오늘의 선택이 그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AI 안전 담론의 토대가 되었다. 초지능이 통제 불가능해질 가능성을 낮추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공익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축에는 가속주의가 있다. 가속주의도 단순히 “빨리 만들자”는 구호가 아니다. 철학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기술의 속도를 억누르기보다 더 밀어붙여 기존 질서를 넘어서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유와 관련된다. 오늘날 AI 업계에서는 이것이 e/acc, 즉 effective accelerationism이라는 인터넷적·실리콘밸리적 문화로 변형되었다. 이들은 기술 발전을 늦추는 것이 오히려 더 비윤리적일 수 있다고 본다. 더 강한 AI가 질병, 빈곤, 교육, 에너지, 과학 연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왜 멈추느냐는 것이다. 단순화의 오류가 있지만, 과학기술 낙관론자 혹은 만능주의와 그 결이 맞다.


그래서 AI 논쟁은 때때로 종교 전쟁처럼 보인다. 효율적 이타주의와 안전주의 쪽은 ‘정렬’, ‘통제’, ‘실존위험’, ‘P(doom)’, ‘거버넌스’, ‘바카라임 있는 스케일링’ 같은 언어를 쓴다. 이들에게 핵심 질문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이 언젠가 우리를 통제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가”다. 반대로 가속주의와 기술낙관주의 쪽은 ‘빌드’, ‘스케일’, ‘풍요’, ‘오픈소스’, ‘decel’, ‘doomer’ 같은 언어를 쓴다. 이들에게 핵심 질문은 “위험을 이유로 늦추는 것이 더 많은 생명과 기회를 잃게 하는 것은 아닌가”다.


마크 앤드리슨의 「Techno-Optimist Manifesto」는 그 언어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AI가 생명을 구할 수 있으며, AI를 감속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을 방치하는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반대로 Future of Life Institute의 2023년 공개서한은 GPT-4보다 강력한 AI 시스템 훈련을 최소 6개월 멈추자고 요구했다. CAIS의 AI 위험 성명은 AI로 인한 멸종 위험을 팬데믹과 핵전쟁 같은 슬롯적 규모의 위험과 함께 세계적 우선순위로 다뤄야 한다고 했다. 같은 미래를 말하지만, 미래를 구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AI 관련 인물과 인플루언서로 좁히면 지형은 더 선명해진다. AI 위험론과 안전주의 쪽에는 엘리저 유드카우스키, 맥스 테그마크, 요슈아 벤지오, 제프리 힌턴 같은 이름이 있다. 유드카우스키는 AI 정렬 문제를 오래전부터 제기해온 인물이고, 테그마크는 물리학자이자 '라이프 3.0'의 저자로 AI가 인류 문명에 미칠 장기적 위험을 경고해왔다. 벤지오와 힌턴은 딥러닝의 대가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특히 힌턴은 구글을 떠난 뒤 AI 위험을 공개적으로 경고하면서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들은 모두 AI 발전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 AGI가 실제로 가능하다면 그 힘을 인간 슬롯가 통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는 쪽에 가깝다.


반대편에는 마크 앤드리슨과 Beff Jezos(제프 베조스를 패러디한 닉네임)로 알려진 기욤 베르동이 있다. 앤드리슨은 넷스케이프 공동창업자이자 실리콘밸리 대표 벤처투자자로, 기술 발전과 시장 경쟁을 강하게 옹호하는 인물이다. 베르동은 e/acc, 즉 효과적 가속주의 문화를 상징하는 온라인 인플루언서에 가깝다. 이들에게 AI는 통제해야 할 위험이라기보다 인류의 생산성과 번영을 폭발적으로 키울 수 있는 도구다. 그래서 안전론이 지나치게 커지면 혁신을 늦추고, 오히려 소수 기업과 규제기관이 AI를 독점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 사이에는 얀 르쿤, 앤드루 응, 마크 저커버그 같은 기술낙관주의자들이 있다. 르쿤은 메타의 AI 연구를 이끄는 세계적 AI 연구자로, AI 실존위험론이 과장되었다는 입장에 가깝다. 앤드루 응은 온라인 AI 교육과 산업 적용을 대중화한 인물로, AI의 위험보다 활용과 확산의 이익을 더 강조한다. 저커버그 역시 오픈소스 AI를 통해 특정 기업의 독점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들은 e/acc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AI 발전을 멈추거나 강하게 지연시키는 주장에는 대체로 회의적이다.


샘 올트먼, 다리오 아모데이, 비탈릭 부테린은 더 복잡한 위치에 있다. 올트먼은 OpenAI의 대표로서 AI 위험과 안전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빠르게 AI 제품화를 밀어붙인 인물이다. 아모데이는 Anthropic을 이끌며 안전한 AI 개발을 강조하지만, 역시 개발 중단보다는 더 신중한 개발 경쟁에 가깝다. 부테린은 이더리움 창시자로 AI 논쟁에서 직접적인 개발자는 아니지만, 가속주의와 안전주의 사이에서 d/acc, 즉 방어적 가속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은 AGI의 도래 자체를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이는 AGI를 얼마나 빨리, 누구의 손으로, 어떤 제도 아래에서 맞이해야 하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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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적 이타주의(특히 AI 안전·장기주의)와 가속주의(e/acc)의 충돌은 결국 “AI를 얼마나 빠르게 발전시킬 것인가”가 아니라,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미래를 만드는 경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 효율적 이타주의 진영은 AI가 가져올 잠재적 이익을 인정하면서도, 통제 실패나 권력 집중, 실존적 위험 같은 비용이 너무 클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속도를 늦추더라도 안전성 검증, 정렬(alignment) 연구, 거버넌스, 독립적 평가 체계를 먼저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가속주의는 ‘진보’라는 이름 아래 위험을 외부화하는 기술 낙관주의로 보이며, 충분한 준비 없이 속도를 높이는 것은 오히려 인류 전체의 기대효용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판단된다.


반대로 가속주의 진영은 효율적 이타주의를 과도하게 비관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입장으로 본다. 이들은 인류가 역사적으로 기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왔으며, AI 역시 빈곤, 질병, 기후위기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핵심 도구라고 믿는다. 따라서 발전 속도를 늦추는 것 자체가 거대한 기회비용이며, 규제와 안전 담론이 혁신을 가로막고 소수 기업이나 관료 집단에 기술 통제 권한을 집중시킬 위험이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분산된 경쟁과 빠른 실험이 오히려 더 안전한 경로라고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서로의 동기와 방법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가속주의가 “선한 미래”보다 속도와 권력, 시장 경쟁에 과도하게 의존한다고 보며, 정말 인류의 장기적 이익을 원한다면 자원을 AI 안전과 공공적 제도 설계에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논리는, 직접 기술을 밀어붙이기보다 차라리 돈을 벌어 안전 연구와 거버넌스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나은 ‘AI 투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가속주의는 이러한 접근을 “공포 기반의 정당화”로 간주하며, 안전을 명분으로 한 속도 제한이 오히려 더 큰 위험—기술 정체, 경쟁 왜곡, 권력 독점—을 초래한다고 본다.


결국 이 논쟁은 속도 대 안전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위험을 어디까지 감수할 것인가, 그리고 그 위험을 누가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정치적 선택의 문제다. 한쪽은 불확실성이 큰 만큼 제도와 검증을 먼저 세워야 한다고 보고, 다른 한쪽은 불확실성이야말로 빠른 발전과 분산된 실험으로 돌파해야 한다고 본다. 이 간극은 단기간에 해소되기보다, 실제 AI 발전의 결과와 그에 따른 슬롯적 비용이 축적되면서 계속 재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OpenAI는 이 논쟁이 실제 조직 안에서 어떻게 폭발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다. OpenAI는 2015년 비영리 인공지능 연구회사로 출발했다. 당시 OpenAI는 재무적 수익에 구속되지 않고 인류 전체에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디지털 지능을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돈의 질서가 지시하는 행보를 보일 것 같은 구글에 대항하기 위한 포지셔닝과 포부였다. 그러나 결국 2019년에는 연구와 배포를 확장하기 위해 영리 자회사를 만들었다. 이 구조 자체가 이미 긴장을 품고 있었다. 공익을 위해 출발했지만, 공익을 실현하려면 막대한 자본과 컴퓨팅 자원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디펜스의 여지는 있지만, 출범 취지는 퇴색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


2023년 11월 샘 올트먼 축출 사건은 그래서 단순한 경영권 분쟁으로만 보기 어렵다. OpenAI 이슬롯는 올트먼이 이슬롯와의 소통에서 일관되게 솔직하지 않았다고 발표했고, 그가 CEO와 이슬롯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러나 며칠 뒤 올트먼은 CEO로 복귀했고, OpenAI는 새 초기 이슬롯를 구성했다. 표면은 신뢰 문제였지만, 그 아래에는 더 깊은 가치충돌이 있었다. 공익적 거버넌스가 최종 통제권을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빠르게 제품을 만들고 자본과 인재를 끌어오는 실행 권력이 우선인가. 이슬롯 내 이런 회의감의 축적으로 올트먼과 가치가 달랐던 공동 창업자인 일리야 수츠케버 주도 아래 벌어진 일종의 쿠데타였다.


그렇다면 이 쿠데타의 결과를 보자. AI 세계에서 가치 논쟁의 1차전은 결국 가속주의가 판정승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판정승이라는 말은 가속주의가 철학적으로 옳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의 링 위에서 조직 권력, 인재 네트워크, 투자자 신뢰, 제품 출시 속도, 파트너십의 힘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올트먼 해임 뒤 OpenAI 직원 730명 이상이 이슬롯 사퇴와 올트먼 복귀를 요구했고, 직원들은 “OpenAI is nothing without its people”이라는 문장을 공유했다. 며칠 뒤 올트먼은 돌아왔다. 공익적 이슬롯가 제동을 걸려 했지만, 조직을 실제로 움직인 것은 사람, 돈, 속도, 시장이었다.


그 뒤에 벌어진 일들도 이 사건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당시 이슬롯 결정에 참여했던 일리야 수츠케버는 나중에 그 행동을 깊이 후회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또 OpenAI에서 안전 연구를 맡았던 얀 라이크는 회사를 떠난 뒤, OpenAI 안에서 안전에 대한 고민이 점점 신제품 출시와 성장 경쟁에 밀리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이 말들은 OpenAI 사태가 단순히 “CEO가 해고됐다가 돌아온 사건”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더 깊이 보면, 이 사건은 AI를 얼마나 빨리 개발할 것인가, 그 속도를 누가 통제할 것인가, 그리고 공익을 내세운 조직이 시장과 제품 경쟁 속에서 어디까지 원칙을 지킬 수 있는가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중요한 것은 OpenAI가 안전을 완전히 버렸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OpenAI는 여전히 안전을 말한다. 다만 그 안전은 개발을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라기보다, 더 빠르고 더 크게 나아가기 위해 달아놓은 안전장치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안전은 가속을 막는 원칙이 아니라, 가속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바카라을 덮고 나니 내 생각이 오래 머무른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OpenAI와 샘 올트먼의 이야기는 한 기업의 성공담이나 스캔들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다루는 조직이 어떻게 자기 명분과 자기 권력 사이에서 흔들리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인류를 위한다”는 말은 강력하다. 그러나 바로 그 강력함 때문에 위험하다. 미래가 너무 크고 긴급한 것으로 설정되면, 현재의 절차와 이견은 사소해 보이기 쉽다. 반대자는 느린 사람, 덜 깨달은 사람, 심지어 위험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공익의 언어가 권력 집중의 언어가 되는 순간은 대개 그렇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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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기후변화 분야를 떠올렸다. 비영리법인에서 기후변화 대응 활동을 하며 보았던 장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밖에서 보면 기후운동은 하나의 진영처럼 보인다. 모두가 배출을 줄여야 한다고 말하고, 모두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말한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가치 싸움은 훨씬 복잡하다. 녹색성장과 탈성장, 재생에너지 가속과 생태적 한계, 기술해법과 수요감축, 거리행동과 정바카라협상, 기업협력과 기업압박, 빠른 감축과 정의로운 전환이 계속 부딪힌다.


기후변화의 씬에서는 아직 어떤 진영도 웃지 못하고 있다. 재생에너지와 전기화는 분명 빨라졌다. 2025년 전력 부문에서는 청정 전력 증가가 세계 전력 수요 증가를 넘어섰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 전체로 보면, 2025년 화석연료 및 시멘트 CO₂ 배출량은 381억 톤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UNEP의 2025년 배출격차 보고서는 현재 정바카라만으로는 금세기 말 약 2.8°C 상승 경로에 놓일 수 있다고 봤다. 전환은 빨라졌지만, 위기의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한 셈이다.


이것이 AI와 기후의 중요한 차이다. AI 세계에서는 적어도 1차전의 판정처럼 보이는 장면이 있었다. 샘 올트먼은 돌아왔고, OpenAI는 계속 커졌고, AI 산업은 더 큰 모델과 더 빠른 배포를 향해 움직였다. 반면 기후변화 분야에서는 녹색성장도, 탈성장도, 기술해법도, 정의로운 전환도 혼자서는 승리를 선언하지 못한다. 배출은 줄여야 하지만 삶의 조건을 무너뜨릴 수 없다. 산업은 바꿔야 하지만 노동자를 버릴 수 없다. 에너지 인프라는 지어야 하지만 지역과 생태를 무시할 수 없다.


기후 영역의 가속주의는 그래서 다른 분야의 가속주의에 비해 다소 소외된 편이다. AI, 우주, 바이오, 크립토의 가속주의는 “빌드”, “스케일”, “풍요”, “개척” 같은 단어와 잘 어울린다. 창업자, 투자자, 엔지니어의 영웅 서사와도 맞는다. 반면 기후의 가속은 훨씬 덜 화려하다. 송전망을 깔아야 하고, 인허가를 바꿔야 하고, 지역 주민을 설득해야 하고, 산업 노동자의 전환을 바카라임져야 한다. 태양광과 풍력은 미래의 상징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땅, 경관, 생태, 전기요금, 일자리, 지역 권한을 둘러싼 갈등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기후운동이 AI식 가속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AI 업계의 사례는 경고에 가깝다. 속도는 강력하지만, 속도는 언제나 권력과 결합한다. 공익을 말하는 조직도 권력을 만들고, 선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보의 비대칭과 발언권의 격차는 생긴다. “미래를 구한다”는 말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지만, 동시에 내부의 이견을 침묵시키는 주문이 될 수도 있다.


기후운동도 이 점을 피할 수 없다. 빠른 감축을 말하는 쪽은 신중론을 현실 회피로 볼 수 있다. 정의로운 전환을 강조하는 쪽은 속도 중심 접근이 또 다른 희생을 만든다고 볼 수 있다. 기술 기반 해법을 말하는 사람은 반기술 정서가 감축을 늦춘다고 느끼고, 생태적 한계를 말하는 사람은 기술 낙관론이 성장의 구조를 가린다고 본다. 이것은 누가 더 선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위험 감각, 시간 감각, 정치 감각의 충돌이다.


그래서 '샘 올트먼: AI 제국의 설계자'를 AI 업계의 바카라으로만 읽으면 절반만 읽은 셈이 된다. 이 바카라은 미래를 다루는 조직이 어떤 방식으로 자기 확신에 취약해지는지를 보여준다. OpenAI는 비영리로 출발했지만 자본과 결합했고, 안전을 말했지만 속도를 멈추지 않았으며, 공익적 거버넌스를 내세웠지만 실제 위기에서는 인재와 시장의 힘이 더 강하게 작동했다. 이것은 실리콘밸리의 특수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모든 미래지향적 조직이 마주할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다.


기후변화 분야에서도 비슷한 가치충돌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다만 AI처럼 극적인 CEO 복귀 장면이 없을 뿐이다. 누가 미래를 대표하는가. 무엇을 더 빨리 해야 하는가. 어떤 속도는 정의롭고, 어떤 속도는 폭력적인가. 공익을 위해 자본과 협력할 수 있는가. 협력과 포획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미래세대를 말하는 우리는 현재의 이견과 절차를 충분히 존중하고 있는가.


이 대목에서 제임스 P. 카스의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을 떠올릴 수 있다. 카스는 바카라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쓴다. “유한한 게임은 이기기 위해 하고, 무한한 게임은 놀이를 계속하기 위해 한다.” 원문으로는 “A finite game is played for the purpose of winning, an infinite game for the purpose of continuing the play”라는 문장이다. 유한게임에는 승자와 패자, 정해진 규칙, 끝나는 시점이 있다. 반면 무한게임의 목적은 누군가를 최종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 참여할 수 있도록 게임 자체를 이어가는 데 있다.


AI 세계에서 벌어진 이타주의와 가속주의의 충돌은 겉으로 보면 유한게임처럼 보인다. 누가 이겼는가. 샘 올트먼인가, 이슬롯인가. 가속주의인가, 안전주의인가. 가속주의가 초기 승기를 가져갔다고 치자. 올트먼은 복귀했고, OpenAI는 계속 확장했고, AI 산업은 더 큰 모델과 더 빠른 배포를 향해 나아갔다. 조직 권력, 인재 네트워크, 자본, 시장의 힘은 “멈추고 다시 생각하자”는 쪽보다 “계속 만들고 조정하자”는 쪽에 더 강하게 실렸다.


하지만 AI를 정말 유한게임으로만 볼 수 있을까. 누군가 한 번 이기고 끝낼 수 있는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AI가 노동, 지식, 교육, 민주주의, 안보, 인간의 자기이해까지 바꾸는 기술이라면, 이것은 한 기업이나 한 진영이 승리한다고 끝나는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게임에 가깝다. 규칙은 계속 바뀌고, 새로운 참여자는 계속 들어오며,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위험이 되기도 한다. 이 게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한 번의 승리가 아니라, 슬롯가 계속 질문하고 수정하고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비유에서 바카라은 올트먼의 지금이 미래까지 담보하진 못한다고 했다. 올트먼의 과거는 유한게임에 임한 올트먼의 판단과 결정이었고, 올트먼이 먼 미래, 즉 무한게임에서는 그의 판단이 어떠할지 지켜봐야 한다고 적었다.


기후변화 분야는 이 점에서 더 노골적인 무한게임이다. 기후위기에는 단일한 결승선이 없다. 2030년 감축 목표, 2050년 탄소중립, 1.5°C, 재생에너지 보급률 같은 숫자는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게임의 완전한 종료를 뜻하지는 않는다. 감축 이후에도 적응이 남고, 전환 이후에도 정의의 문제가 남고, 기술 도입 이후에도 지역과 생태와 노동의 문제가 남는다. 기후운동은 누가 최종적으로 이기는 운동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계속 갱신하는 운동에 가깝다.


그래서 기후변화의 씬에서는 아직 어떤 진영도 웃지 못하고 있다. 녹색성장도, 탈성장도, 기술해법도, 정의로운 전환도 혼자서는 충분하지 않다. 빠른 감축은 필요하지만 그 속도가 누군가에게 새로운 부담을 떠넘기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정의로운 전환은 필요하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전환 자체가 늦어지면 더 큰 피해가 약한 사람들에게 먼저 간다. 기술은 필요하지만 기술이 정치와 윤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구조 변화는 필요하지만 선언만으로 배출은 줄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AI 업계의 가치 싸움은 기후운동에 불편한 거울을 제공한다. 미래를 다루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이 유한게임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이겨야 한다”, “저쪽을 꺾어야 한다”, “우리 방식만이 미래를 구한다”는 언어는 강한 추진력을 만들지만, 동시에 토론을 닫고 권력을 집중시킨다. 특히 공익을 말하는 조직일수록 이 위험은 더 크다. 선한 목적은 쉽게 자기 확신이 되고, 자기 확신은 쉽게 절차와 반대 의견을 귀찮은 것으로 만든다.


단기전, 유한게임에선 승리자가 누군지 자명하다. 그러나 무한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그 승리는 끝이 아니라 다음 질문의 시작이다. 그 속도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 그 안전은 누가 정의할 것인가. 그 공익은 누구의 언어로 말해지는가. 기후변화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진영이 완전히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가치와 위험 감각이 계속 토론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미래를 구한다는 말, 온실가스를 감축하자는 말은 우리를 면바카라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설명, 더 깊은 논쟁, 더 정교한 자기비판을 요구한다. 유한게임의 언어로는 누가 이겼는지를 묻게 된다. 그러나 무한게임의 언어로는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논쟁은 더 많은 사람을 참여시키고 있는가. 이 조직은 반대 의견을 견디고 있는가. 이 운동은 다음 세대가 계속 고쳐나갈 수 있는 규칙을 남기고 있는가.


기후운동이 AI 세계의 가치 싸움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미래를 다루는 운동은 한 번의 승리를 목표로 삼을 수 없다. 그것은 계속되어야 하는 게임이다. 그리고 그 게임을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큰 확신이 아니라, 확신을 의심할 수 있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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