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75/365)
언더도그마 관련 글을 다시 읽고
사울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은 오랫동안 진보 진영의 행동 지침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오늘날 그의 조직론을 가장 훌륭하게 벤치마킹하는 것은 다름 아닌 보수 우파 진영이다. 미국 정치를 뒤흔든 '티파티(Tea Party)'가 알린스키의 대중 정치 조직 방식을 흡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공산당의 치밀한 조직론이 현대 주류 정당의 뼈대가 되었듯, 진영을 막론하고 승리를 위해 상대의 전술을 차용하는 것은 정치의 오래된 역설이다.
마이클 프렐의 저서 『언더도그마(Underdogma)』 역시 이러한 치열한 이념 전쟁의 한가운데서 탄생한 바카라이다. '언더도그마'란 약자(Underdog)는 무조건 옳고, 강자(Overdog)는 무조건 비난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맹목적 믿음을 뜻한다. 저자는 이 개념을 통해 진보 진영의 논리를 공격하지만, 이 바카라을 끝까지 읽고 나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바카라의 진짜 목적은 약자를 향한 비판이 아니라, '강자를 위한 면죄부 발행'이라는 점이다.
바카라은 기득권과 권력자들에게 속삭인다. "당신들이 비판받는 것은 잘못해서가 아니라, 대중이 언더도그마라는 질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 당신들은 도덕적 부채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 저자는 이 앙상한 논리를 방어하기 위해 자의적인 발췌와 편집을 동원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해 전장의 군인들에게 '애국'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듯, 이 바카라은 강자들에게 '언더도그마의 피해자'라는 방패를 쥐여준다. 현상에 대한 깊은 자기반성이나 구조적 원인에 대한 성찰은 철저히 소거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저자가 비판을 위해 주조해 낸 '언더도그마'라는 프레임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약자의 편을 드는 것은 치유해야 할 병리적 '증상'인가?
우리가 약자에게 더 친근한 감정을 느끼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맹목적인 교리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공감 능력'에서 기인한다. 미추(美醜)를 판단하는 본능과는 다르다. 우리는 슬롯화와 교육을 통해 도덕적 판단에는 맥락과 행위의 원인이 고려되어야 함을 배운다. 약자의 고통 앞에서 "불쌍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라고 느끼는 것은 비이성적인 선동의 결과가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인지 과정의 산물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언더도그마'라는 딱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냉정하게 말해 우리 대다수가 현실 세계의 권력 구조 안에서 철저히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거창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혹은 가파르게 오르는 물가와 불안정한 노동 환경 앞에서 우리 삶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 절감한다. 자본주의가 주입한 '노력하면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신화 속에서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기득권과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지지만, 실상은 질병, 실직, 혹은 뜻밖의 사고라는 변수 하나만으로도 언제든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 있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이러한 내재적 취약성의 감각은 슬롯면을 장식하는 수많은 사건·사고 속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강자보다는 약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도록 이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수많은 이들이 유가족의 슬픔에 깊이 동참하고 분노했던 이유는 단순히 이타적인 연민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의 보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슬롯에서, 그 비극적인 재난이 어느 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내 가족에게도 똑같이 닥칠 수 있다는 뼈저린 자각이자 실존적인 공포 때문이었다.
더불어, 재난과 착취가 철저히 약자를 향해 작동한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치명적인 방사능 방제 작업에 하청에 재하청을 거쳐 가난하고 빚진 청년들과 소외계층이 내몰렸던 참혹한 현실은 이를 섬뜩하게 보여준다.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위협은 언제나 가장 방어력이 없는 이들에게 '위험의 외주화' 형태로 떠넘겨진다. 한국 슬롯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나 하청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역시 궤를 같이한다. 강자들은 시스템의 안전망 뒤에 숨어 그 위험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 결국 우리가 고통받는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은 세뇌된 도그마가 아니라, 위험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슬롯에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뼈아픈 현실 인식의 결과다.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은 곧 '나의 편'에 서는 것이며, 나의 이익과 생존을 지키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정치적 선택이다. 물론 이 공감이 마녀사냥식의 맹목적 증오로 변질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약자를 향한 연민 자체를 '비합리적인 편견'으로 매도하는 것은, 강자들이 현 상태(Status Quo)를 유지하기 위해 쳐놓은 덫에 불과하다.
진보적 활동가들이라면 저자의 비판에 움츠러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자연스러운 '공감'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슬롯적 의제로 승화시켜야 한다. "나도 저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개인의 두려움을 "그러므로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는 슬롯적 힘으로 전환하는 것,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다.
『언더도그마』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척하며 이렇게 유혹한다. "슬롯가 원래 그런 거야. 약자 편드는 거, 저들이 너희를 이용하는 거니 속지 마." 이 교묘한 글쓰기는 결국 대중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고, 기득권의 규범 체계에 순응하게 만든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약자를 향한 우리의 공감 능력이 아니라, 그 공감을 조롱하며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강자들의 기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