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뭐야?”라는 질문

2026 All-Day-Project (167/365)

byJamin

유튜브 예능 영상의 한 장면이 뜻밖의 날카로운 울림을 준다. 개그맨 지상렬이 까마득한 후배 정호철에게 녹화 중 몇 차례나 “너 이름이 뭐야?”라고 반복해서 묻자, 옆에 있던 신동엽이 씩 웃으며 이렇게 받아친다.


“이게 다 너 이름 알려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한 방송인에게 이름을 깜빡하는 ‘시니어의 실수’처럼 보일 수 있는 이 행동은, 사실 조직에서 진짜 매니저가 해야 할 일의 정수를 보여준다. 자신의 발언권과 입을 빌려, 조직 내에서 타인의 존재와 기여를 각인시키는 행위. 즉, ‘구성원의 가시성(Visibility)’을 확보해 주는 리더십이다.


1. 관료제의 냉소적 진실과 ‘피터의 법칙’


오래된 레거시 기업에는 잔혹하지만 정직한 잠언(潛言)이 전해 내려온다.


“조직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상사의 승진이다. 그걸 목표로 삼아야 너도 승진한다.”


이 말은 관료제 조직의 생리적 논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성과보다 충성, 창의보다 안전, 팀의 결과보다 상사의 눈치가 앞서는 구조다. 승진하기 위해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상사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 혈안이 된다.


경영학에는 이를 설명하는 ‘피터의 법칙(Peter Principle)’이 있다. 능력을 인정받아 관리자로 승진한 인물들이 결국 자신의 무능력이 드러나는 단계까지 올라가 정체된다는 이론이다. 관료제 조직에서 무능해진 매니저들은 흔히 한 가지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바로 ‘성과 탈취(Credit Stealing)’다. 자신이 직접 실무를 하지 않기에, 자리를 지키려면 팀원들의 기여를 흡수해 윗선에 자신의 성과인 양 ‘보고’하는 전달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가 지배하는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일 자체보다 상사의 승진 일정에 맞춰 움직인다. 개인의 기여는 이름 없이 ‘팀의 성과’라는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조직은 생존을 위한 기생 전략으로 가득 차게 된다.


2. 진짜 매니저의 일: ‘스포트라이트’를 옮기는 사람


진짜 매니저라면 관료제의 관성을 깨야 한다. 핵심은 각 개인, 즉 DRI(Directly Responsible Individual·직접 바카라임자)들의 구체적인 일을 찾아내고 그들의 기여를 조직에 증명해 주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 팀원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 이름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일이다.


심리학에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이 가장 주목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스포트라이트 효과(Spotlight Effect)’라는 개념이 있다. 평범한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리더십의 본질은 이 스포트라이트를 ‘나’에게서 ‘팀원’에게로 돌리는 것(Shifting the Spotlight)에 있다. 단순히 연말 평가 때 단둘이 앉아 “올해 수고했다”고 말하는 건 진짜 인정이 아니다. 조직의 공식적·비공식적 소통 채널에서 특정인의 이름과 그가 한 실무적 기여를 끊임없이 연결해 주는 ‘슬롯적 인정(Social Recognition)’이 필요하다.


조직의 고위 임원들이 참석한 주간 보고 자리는 이를 실천할 가장 좋은 무대다. 많은 매니저가 효율성을 핑계로 “이번에 저희 팀이 성과를 달성했습니다”라고 축약해 말한다. 하지만 진짜 매니저는 구체적인 이름을 꺼내 든다.


“이번 분기 A 지표가 20% 개선되었습니다. 이건 김호철 님이 데이터 구조를 완전히 재설계했고, 이영희 님이 고객 인터뷰를 통해 핵심 인사이트를 뽑아냈으며, 박민수 님이 리스크를 조기 발견해 방어해 준 덕분입니다.”



이 한 마디의 차이가 만드는 경영학적 효과는 강력하다.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의 형성: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에이미 에드먼드슨(Amy Edmondson) 교수가 강조했듯, 고성과 팀의 비밀은 "내 성과를 상사가 가로채지 않고, 내 제안이 부당하게 묻히지 않는다"는 신뢰에 있다. 내 기여가 상사에 의해 증폭되어 전달된다는 확신이 있을 때, 팀원은 두려움 없이 창의성을 발휘한다.


조직 내 가시성(Visibility) 확보: 경영진이나 타 부서 시니어들은 “저 팀의 저 사람이 그 일의 진짜 DRI구나”라고 인지하게 된다. 이는 해당 인물에게 향후 핵심 프로젝트 참여나 승진 등 실질적인 기회로 연결된다.


인정 문화의 전염: 매니저가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는 팀 내 동료들 간에도 서로를 인정하는 관행을 만들고, 결과적으로 조직 전체의 공기를 바꾼다.



3. 반대편에 서 있는 매니저: ‘창문과 거울’을 거꾸로 보는 사람


이와 정반대의 매니저도 존재한다. 그들은 보고서의 작성자(Author)나 실무자가 주니어임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주어를 바꾼다.


“우리 팀에서 제가 전반적으로 기획하고 지휘해서…” (실제론 아이디어만 던짐)

“OO 부서에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핵심 인물의 이름을 지워버림)


경영학자 짐 콜린스(Jim Collins)는 위대한 기업의 조건으로 ‘창문과 거울(Window and Mirror) 법칙’을 제시했다. 리더는 일이 잘되었을 때는 ‘창문’ 밖을 내다보며 성과의 요인을 팀원과 외부의 공으로 돌리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에게 바카라임을 물어야 한다는 법칙이다.


나쁜 매니저는 이 창문과 거울을 정반대로 사용한다. 일이 잘되면 거울을 보며 “내가 잘해서”라고 자찬하고, 일이 잘못되면 창문 밖을 가리키며 “실무자가 미숙해서”라고 질바카라을 전가한다.


이런 매니저는 단기적으로 상사에게 ‘장악력 있는 일 잘하는 리더’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직 내 신뢰 자산을 모두 소진한다. 진짜 유능한 DRI들은 기여를 인정받지 못해 조직을 떠나거나 침묵을 선택하고, 결국 남는 것은 관료제 시스템에 최적화된 눈치 빠른 생존자들뿐이다.


4. 시니어의 아이러니: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다시 예능의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지상렬이 “너 이름이 뭐야?”를 반복하는 그 짧은 순간, 시청자의 뇌리에는 ‘정호철’이라는 낯선 주니어 개그맨의 이름이 강제로 각인된다. 신동엽이 그 노련한 의도를 캐치해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이름의 존재감은 배가된다.


이것이 바로 조직 내 시니어가 보여야 할 진짜 태도다. 자신이 화려하게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영향력, 발언권, 그리고 상급자들의 시선을 이용해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의 이름을 조명하는 것이다.


과거의 리더들처럼 가부장적으로 “내가 키운 자식 같은 녀석”이라며 생색내듯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담백하게 그 사람이 한 일의 실무적 사실을 그대로, 반복해서, 조직의 윗선이 잊지 못하도록 ‘이름’을 박아 말해주는 것이다.


지상렬이 이름을 ‘몰라서’ 묻는 척했지만, 사실 그 행위는 ‘세상에 너무 알리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다는 아이러니. 진짜 매니저는 바로 이 아이러니의 힘을 안다.


결국 리더십의 정의는 이렇게 뒤집힌다. 리더는 앞서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한 일을 늘어놓는 대신, “우리 팀의 누구는 이걸 했고, 누구는 저걸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만약 당신이 오늘 누군가를 이끄는 팀장이나 매니저라면, 다음 보고 자리에서 이 한 가지만 시도해 보라. 보고서에서 ‘제가’, ‘저희 팀이’라는 단어를 줄이고, 대신 묵묵히 고생한 팀원들의 이름과 그들이 해낸 구체적인 실무를 하나씩 꺼내놓는 것이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당신 조직의 공기와 신뢰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https://youtu.be/tirco8BBkVQ?si=f8xR9RZFP0c9TJJE&t=2630

이 영상을 보다가 생각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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