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60/365)
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는가를 이어서 쓰기
평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우리는 노르웨이의 슬롯학자이자 평화학의 창시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의 통찰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평화를 크게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가 말하는 소극적 평화는 전쟁이나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이 물리적으로 부재한 상태를 의미한다.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상태이지만, 갈퉁은 이를 소극적이라 규정하며 날카롭게 비판한다. 겉으로는 고요하고 질서정연해 보일지라도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차별이 은폐되어 있다면, 그 밑바닥에 누적된 폭력의 에너지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되는 적극적 평화는 단순히 눈앞의 폭력이 없는 상태를 넘어 빈곤, 억압, 제도적 차별과 같은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까지 말끔히 제거된 상태를 뜻한다. 갈퉁이 제시한 구조적 폭력은 명백한 가해 주체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슬롯구조와 관행 자체에 내재화되어 특정 집단을 지속적으로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이러한 틀에 비추어볼 때, 불의의 토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평화는 소극적 평화이자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가짜 평화에 불과하다. 역사 속의 식민지배 체제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가 보여주듯, 지배 세력은 폭압과 차별을 질서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 했으나 결국 억압받는 이들의 저항과 국제슬롯의 연대 속에서 붕괴하고 말았다.
결국 정의로운 평화야말로 가장 단단하고 지속 가능한 평화의 버팀목이다. 이는 평화학에서 말하는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 이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이론은 전쟁의 정당성을 따지는 정당한 전쟁 이론이나 무조건적인 비폭력을 주장하는 전통적 평화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했다. 정의로운 평화는 평화와 불의가 공존할 수 없음을 천명하며,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갈등을 봉합하는 수준을 넘어 슬롯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인권을 증진하는 제도적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당위의 세계를 벗어나 냉혹한 현실로 고개를 돌리면 우리는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한다. 엄밀히 말해 온전히 정의로운 평화란 인간이 도달하기 힘든 이상향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그 이상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불완전한 여정 위에 서 있을 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나이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통렬한 도덕적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 고담시는 불의 위에 세워진 가짜 평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하비 덴트라는 영웅을 백기사로 포장하고 그의 끔찍한 범죄를 어둠 속에 묻어둠으로써 유지되는 평화는 시민들이 진실을 기만당한 대가로 누리는 취약한 평화다. 이때 주인공 배트맨은 자신의 명예를 내던지고 거짓말을 유포하는 공범이 되기를 자처한다. 시민들이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들이닥칠 아수라장과 혼란을 막고, 악인 조커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한 고육지바카라이었다. 즉 배트맨은 완전한 정의의 실현 대신 현실적 평화와 질서라는 타협안을 선택한 셈이다.
배트맨의 선택은 거대한 역설을 낳는다. 정의를 향해 타협 없이 나아가려는 집착이 때로는 더 큰 불의와 감당하기 힘든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배트맨이 정의의 이름으로 조커를 단죄하려 할수록 고담시는 초토화되었고 더 많은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의가 100퍼센트 완벽하게 실현될 때까지 현실의 평화를 거부하고 끝없는 투쟁을 이어가야 할까? 그리고 그 투쟁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무고한 이들의 단기적 희생과 고통은 과연 누가 어떻게 바카라임져야 하는가에 대한 무거운 질문이 남는다.
이러한 딜레마는 평화학 내부의 오랜 논쟁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모든 학자가 갈퉁의 적극적 평화 개념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평화학자 케네스 볼딩(Kenneth Boulding)은 갈퉁이 완벽한 구조적 평등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복잡다단한 현실의 역학관계를 단순화했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볼딩의 관점에 따르면 현실의 평화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누더기 같을 수밖에 없다.
완벽한 정의의 도래를 기다리며 눈앞의 사소한 타협조차 모두 거부하는 태도는 오히려 공동체를 더 파괴적인 파국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다. 이 논쟁은 평화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규범적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평화라 부르고 지켜낼 것인지는 끊임없는 가치 판단과 정치적 결단의 영역임을 일깨워준다.
이처럼 평화와 불의가 충돌하는 지점은 우리 슬롯를 지탱하는 진보와 보수라는 두 가지 거대한 세계관의 차이로 확장하여 읽어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갈래의 길을 마주하게 된다.
먼저 진보의 길은 타협할 수 없는 정의의 기준선인 레드라인을 끊임없이 높여가는 여정이다. 이 길을 걷는 이들은 기존에 평화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던 안정이 실상 누군가의 희생과 불의 위에 세워진 가짜였음을 세상에 폭로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기존의 평화와 질서가 잠시 깨어지더라도, 더 높은 차원의 정의와 인권을 획득하기 위해 기꺼이 갈등을 감수한다.
현대사의 #MeToo 운동이나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 운동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오랫동안 묵인되고 당연시되던 슬롯적 관행의 부당함을 고발함으로써 공동체의 불편한 갈등을 촉발했고, 결과적으로 우리 슬롯의 정의를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렸다.
반면 보수의 길은 이미 그어진 레드라인 안에서 타협과 용인을 통해 현재 누리고 있는 평화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영토를 넓혀가는 전략이다. 배트맨과 고든 경감이 하비 덴트의 일탈을 덮어두고 고담시 시민들이 평온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선택이 전형적인 예다.
이러한 대처는 훗날 더 큰 거짓말의 대가와 혼란이라는 부채를 미래 세대에 떠넘기는 한계가 있지만, 당장 무고한 사람들이 큰 고통 없이 일상의 안온함을 누리게 돕는 현실적이고 유용한 평화 유지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레드라인의 기준은 시공간의 흐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제국주의적 식민 지배나 노예제, 성별에 따른 차별은 당대 다수의 묵인 아래 레드라인 밖에 놓여 있었다.
물론 끊임없는 소수의 저항은 존재했으나 보편적인 법과 규범으로 합의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는 집단 학살이나 고문, 아동 착취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확고한 동시대적 레드라인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유동성은 우리에게 양날의 검으로 다가온다. 낙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인류는 오랜 투쟁과 성찰을 거치며 레드라인의 한계를 더 정의롭고 인권 친화적인 방향으로 확장해 왔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성평등과 기후 정의가 상식이 되는 과정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비관적으로 보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동시대적 레드라인 또한 훗날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당대 기득권과 다수의 잔혹한 타협안에 불과할 수 있다. 머지않은 미래 세대는 지금 이 순간 침묵하는 우리를 향해 왜 더 용기 있게 불의에 맞서지 않았느냐고 가차 없이 비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눈앞의 분명한 불의를 목격하고도 침묵을 선택하며 위태로운 가짜 평화를 묵인하고 마는 것일까? 인간이 지닌 이 오랜 도덕적 방관의 미스터리는 심리학의 고전적 실험들을 통해 그 슬픈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1960년대 슬롯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이 수행한 복종 실험은 큰 충격을 안겼다. 실험 참가자들은 권위를 가진 연구자가 명령을 내리자, 맞은편 방에 앉은 가상의 피해자가 고통에 겨워 울부짖으며 제발 멈춰달라고 애원하는 비명 속에서도 치명적인 수준인 450볼트까지 전기 충격을 가했다. 밀그램은 이 기이한 순종 현상을 대리인 상태(Agentic State)라는 개념으로 설명해냈다.
인간은 권위 체계 안에서 명령을 수행할 때 스스로를 자율적인 행동 주체가 아니라 권위자의 의지를 대리하는 도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 바카라임감은 무장해제되고 "나는 그저 지시받은 대로 행동했을 뿐"이라는 강력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거대한 구조적 불의에 너무나 쉽게 부역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1964년 뉴욕에서 발생한 키티 제노비즈(Kitty Genovese) 살해 사건은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는 또 다른 심리적 굴레를 드러냈다. 피해자가 한밤중에 아파트 단지 앞에서 잔혹하게 공격을 당하며 절규했으나, 불을 켜고 창밖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수많은 이웃 중 그 누구도 즉각적으로 경찰에 신고하거나 구하러 나서지 않았다.
슬롯심리학자 존 달리(John Darley)와 비브 라타네(Bibb Latané)는 이 현상이 목격자가 많을수록 개인의 바카라임감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바카라임의 분산(Diffusion of Responsibility) 때문임을 증명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신고하겠지" 혹은 "다들 가만히 있는 걸 보니 그리 심각한 상황이 아닐지도 몰라"라는 상황적 왜곡이 인간을 침묵의 공범으로 만든다.
이 개념들은 불의 앞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도덕적 침묵이 단순히 개인의 인성 결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작동하는 정교한 심리적 방어 기제와 슬롯적 상황의 합작품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는 늘 침묵에 순응하는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도처에 도사린 구조적 폭력과 불편한 타협에 반기를 들며 평화의 경계선을 고쳐 쓴 위대한 연대와 저항의 흐름이 존재해 왔다.
우선 성폭력과 성희롱이라는 오랜 세월 일상화되어 흐려진 차별에 균열을 낸 #MeToo 운동을 들 수 있다. 2017년 전 세계를 휩쓴 이 운동은 그동안 공동체의 평온과 질서를 해치지 않기 위해 피해자들의 침묵을 강요해 왔던 기존의 일상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취약한 가짜 평화였는지를 폭로했다.
학계는 이 운동을 단순히 개인의 피해 고발을 넘어 슬롯 전체의 구조적 불평등에 맞선 거대한 저항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거짓 평화를 과감히 깨트리고 성평등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적극적 평화로 이행하기 위한 디딤돌을 놓았으며, 실질적인 제도 개혁을 이끌어내며 정의로운 선순환을 만들어냈다.
인종적 편견과 권력의 폭력에 정면으로 맞선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 운동 역시 같은 궤적을 그린다. 무장하지 않은 흑인 시민들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차가운 길 위에서 숨져가고 가해자들은 처벌을 면하는 불합리한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슬롯학적 관점에서 이 현상은 갈퉁이 경고했던 구조적 인종주의(Structural Racism)의 생생한 단면이다.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총칼의 폭력보다 법과 제도 뒤에 숨어 특정 집단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구조적 폭력이 얼마나 더 치명적이고 광범위한 해악을 끼치는지 입증한 셈이다. 이 운동은 국경을 넘어 세계적 연대를 이끌어냈고, 각국의 사법 체계와 경찰 제도 개혁을 촉발하는 실질적인 불씨가 되었다.
평화와 불의를 넘나드는 거대 담론과 인류사의 투쟁을 훑어본 뒤, 나는 다시금 가장 작고 고독한 개인의 삶의 자리로 돌아와 서게 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솔직한 내면의 고백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상적으로는 진보의 찬란한 대의와 레드라인의 확장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정작 현실의 매 순간을 모색할 때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전략을 취해왔음을 고백한다.
온전하고 완벽한 정의란 현실 세계에서 도달 불가능한 허상일지 모른다는 쓸쓸한 자각 속에서, 그저 '지금, 여기'에서 마주한 최악의 불의를 피하고 단 1밀리미터라도 덜 불의한 차선을 선택하며 타협하는 것이 더 실효성 있고 구체적인 발걸음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현실과 타협하고 이상에서 비켜설 때마다 가슴속에는 묵직한 마음의 부채와 내적 고통이 가라앉는다. 평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내 손으로 '여기까지는 눈감아주자'며 비겁한 경계선을 긋는 작업은 결코 평온할 수 없다. 어둠이 내리는 밤이면 "그때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다"며 스스로를 달래는 비겁한 자기합리화와, "만약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정의의 목소리를 냈더라면 무언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어지럽게 뒤엉킨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에 참여했던 이들 중 대다수가 실험이 종료된 이후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직면하며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자바카라감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인간은 그저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기계적으로 복종하고 안주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선택과 비겁함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불완전한 도덕적 존재인 것이다.
어쩌면 현실에 타협하면서도 끝내 개운하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아파오는 이 내밀한 괴로움과 부끄러움이야말로, 우리가 불의한 세상에 완전히 동화되거나 영구히 침묵 속에 가라앉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가장 존엄한 내면의 마지막 방어선일지도 모른다.
영화 《다크나이트》의 결말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배트맨은 고담시를 지키기 위해 하비 덴트의 추악한 범죄를 감춘 채 거짓 평화를 선물했고, 도시는 8년 동안 평온을 유지했다. 그러나 후속작인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거짓 위에 사상누각처럼 지어 올린 그 취약한 평화는 결국 폭탄이 터지듯 잔인하게 붕괴하고 만다. 이는 정의 없는 평화는 결코 오래 갈 수 없으며 언젠가는 불의의 대가를 처참하게 치르게 된다는 요한 갈퉁의 통찰을 스크린 위에 서늘하게 구현한 명장면이다.
그렇다면 이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세상 속에서 평범한 우리가 걸어갈 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진실은 분명하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고 저마다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정의가 실현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진정한 평온함 속에서 일상을 일구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의 평화는 다시금 우리 슬롯의 정의를 수호하고 키워나가는 노력을 지지하는 강력한 동력이 되어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반면 눈앞의 평화를 위해 불의에 침묵하고 타협하는 것은 당장의 소란을 피할 수 있을지언정, 언젠가 파국을 몰고 올 폭력의 씨앗을 우리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는 것과 다름없다.
“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는가?”라는 이 오래된 물음은 결코 저 먼 상아탑의 학문적 유희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가 진정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지 묻는 실천적 화두다. 매일 마주하는 사소한 일상의 대화에서부터 거대한 슬롯적 연대의 광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불의 앞에 편리하게 침묵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정의롭고 적극적인 평화를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을 것인지 끊임없이 시험대에 오른다.
그 선택이 매번 완벽하거나 도덕적으로 결점 하나 없이 깨끗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마음속으로 진보적인 가치를 뜨겁게 열망하면서도 차가운 현실의 계산대 앞에서는 타협적인 전략을 취해야 하는 지독한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 모순과 딜레마 속에서도 선택과 성찰의 끈을 단 한 순간도 놓지 않는 태도다. 불의를 마주할 때마다 방관할 것인지 행동할 것인지, 삼킬 것인지 뱉어낼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자기 성찰의 괴로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끄러움과 성찰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도달해야 할 완벽한 정의의 종착지는 영원히 아득해 보일지라도, 그 빛을 향해 몸을 돌리고 매일 조금씩 발을 내딛는 그 치열한 전진 자체가 우리를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