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함께 창의성을 해킹하는 법

2026 All-Day-Project (026/365)

by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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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37: 빠르게 일하는 날과 느리게 일하는 날 을 보고

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38: 음성을 지배하는 자가... 을 보고

기사/인터넷을 보고 생각 정리하기 039: 창의력이 가장 실용적인 기술이... 를 보고


"이제, 창의성(Creativity)은 가장 실용적인 기술이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자 작가인 César Soto Valero는 최근 블로그를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과거에 "나한테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몽상가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AI 덕분에 코딩, 글쓰기, 디자인 같은 '실행(Execution)'의 비용이 0에 수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정의하는 능력이다.


이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경제학의 기본 원리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희소성이 가치를 결정한다. 과거에는 '실행 능력'이 희소했다. 코딩할 줄 아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디자인 감각이 있는 사람은 귀했다. 그 희소성이 곧 그들의 시장 가치였다. 그런데 AI가 이 희소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잠들지 않고, 지치지 않으며, 무한대로 복제 가능한 실행 능력. 공급이 무한대가 되면 가격은 0에 수렴한다.


저자는 이 능력을 기르기 위해 '창의적 단식(Creative Fasting)'을 제안한다. 정보를 차단하고, 뇌를 심심하게 만들고, 손으로 직접 그려가며 생각을 숙성시키라는 것이다. 동의한다.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를 켜기 위한 고독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싶다. 우리가 그 '고독한 숙고'의 과정조차 AI라는 도구와 함께 더 날카롭게 다듬을 수는 없을까? 기술 낙관론자로서, 나는 AI가 단순히 결과물을 뱉어내는 하청 업자가 아니라, 우리의 창의적 근육을 자극하는 최고의 스파링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1. 멍 때리기 전에, '문제'부터 정의하라


무작정 멍을 때린다고 유레카가 찾아오진 않는다. 창의성은 '잘 정의된 문제'라는 그릇 위에서만 피어난다. 저자는 숙고를 강조했지만, 숙고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질문의 질이다.


여기서 AI의 역할이 시작된다. 혼자 끙끙대는 대신 AI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A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지만 내가 놓치고 있는 본질적인 제약조건이 뭘까? 이 문제를 완전히 다르게 정의해 줄 수 있어?"


AI는 소크라테스처럼 끈질기게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사각지대를 찌른다. AI와의 대화를 통해 문제의 윤곽이 명확해질 때, 비로소 인간의 진짜 '숙고'가 시작될 준비가 된 것이다.



2. '뻔한 생각'의 찌꺼기를 빠르게 걷어내기


Valero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수도꼭지의 녹물을 빼내듯 초기 아이디어를 배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가장 먼저 '클리셰(Cliché)'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AI로 가속화해보자. 나는 종종 AI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뻔하고 통념적인 해결바카라 10가지만 나열해 줘."


AI가 순식간에 뱉어낸 10가지 리스트는 일종의 '오답 노트'다. 나는 그것들을 지워나가는 것에서부터 사고를 시작한다. 남들이 며칠을 고민해 도달할 뻔한 결론을, AI를 통해 1분 만에 건너뛰고 바로 'Level 2'의 사고로 진입하는 것. 이것이 AI 시대의 효율적인 창의성이다.



3. 매체 변환의 장벽 허물기 (Media Switching)


글이 막히면 그림을 그리고, 코드가 막히면 글로 써보라는 조언은 유효하다. 매체를 바꿀 때 뇌는 새로운 경로를 탐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에 소질이 없는 사람에게 이 조언은 또 다른 스트레스일 뿐이다.


AI는 이 '매체 변환'의 비용을 제로로 만든다. 기획서의 논리가 맞는지 헷갈린다면 AI에게 "이 내용을 만화 콘티로 짜줘"라고 하거나 "이 비즈니스 모델을 초등학생을 위한 우화로 바꿔줘"라고 시켜보라. 텍스트로 볼 때는 완벽해 보였던 논리가, 시각적 묘사나 쉬운 비유로 바뀌는 순간 헛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AI가 변환해 준 결과물을 거울삼아 내 생각의 빈틈을 메울 수 있다.



4. 창의성의 재정의: 발명이 아니라 '지휘'다


결국 AI 시대의 창의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고통스러운 발명'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맥락에 맞는 것을 골라내는 '판단(Judgment)'이며, AI라는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소리를 내게 하는 '지휘(Conducting)'에 가깝다.


우리는 AI에게 지루한 실행뿐만 아니라, 창의적 발상을 위한 준비 운동까지 맡길 수 있다. 그렇게 아낀 인지적 에너지를 가지고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마지막 순간의 '결정'이다.


이 수많은 아이디어 중 무엇이 우리 브랜드의 '결'에 맞는지, 무엇이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는 '개연성'을 갖추었는지 판단하는 것. 기술이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그 인간적인 안목(Eye)이 가장 실용적이고 비싼 기술이 될 것이다.



5. 욕망하는 능력: 실행의 시대가 가고 질문의 시대가 온다


여기서 더 깊은 층위로 내려가 보자. AI가 '어떻게'를 해결해줄수록, '무엇을'과 '왜'의 무게가 커진다. 이것은 단순히 아이디어를 잘 떠올리는 능력을 넘어선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 즉 '욕망하는 능력'이 핵심이 된다.


AI는 지치지 않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 AI에게는 결핍이 없다. 고통이 없다. 무언가를 미치도록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없다. 예술은 언제나 인간의 결핍과 갈망에서 시작되었다. 이건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다.


도구는 기본적으로 바깥을 향해 있다. 더 넓게 알고, 더 깊게 분석하고, 더 빠르게 처리한다. 세상을 다루는 능력이 확장된다. 그런데 "내가 뭘 원하는가"는 바깥에 답이 없다. 아무리 강력한 도구를 써도, 검색해도, 분석해도 나오지 않는다. 이건 안으로 파고들어야만 찾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어쩌면 도구가 바깥 세상을 더 잘 다룰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는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가 AI 시대에 다시 절실해지는 건 묘한 아이러니다. 가장 오래된 질문이 가장 새로운 맥락에서 돌아온다.


6. '바른 욕심'이라는 질문: 증강된 개인의 윤리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더 떠오른다. 욕심을 부려야 한다고 했는데, 어떤 욕심을 부려야 하는가?


도구가 개인의 능력을 증강시키는 시대에, 태도의 비중이 더 커진다. 예전에는 개인의 능력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정해져 있었다. 시스템이 개인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도구가 개인을 증강시킨다. 예전에는 팀이 필요했던 일을 혼자서 할 수 있게 된다.


이건 분명 좋은 일이다. 개인의 가능성이 확장된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가능성도 열린다. 증강된 개인들이 각자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려 할 때 벌어지는 일. 모두가 시스템을 이기려 하면, 시스템이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바른 욕심"이라는 말이 자꾸 맴돈다. 솔직히 바른 욕심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다만, 이게 질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점점 강해진다. 능력을 키우는 것만큼, 그 능력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묻는 것. 동기를 갖는 것만큼, 그 동기의 방향을 살피는 것. 이게 빠지면 위험하다.


7. 운전대를 놓지 않는 법: AI와 '나'


나는 기술 낙관주의자다. 단, 이 문장에는 주어가 빠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기술을 쥔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자"다.


기술이 알아서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 믿는 종류의 낙관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이다. 신앙에는 바카라임이 없다. 반면 도구를 쥔 손에는 바카라임이 따른다. 나는 그 바카라임을 회피하지 않을 인간을 믿는다.


생성형 AI는 확률적으로 가장 정답에 가까운,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제시하는 데 탁월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바꾼 순간들은 대개 '효율적인 정답'이 아니라, 당시에는 미친 짓 취급받던 '무모한 오답'에서 나왔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오염된 배양 접시를 버리지 않고 '이상하게' 여긴 비효율적인 호기심이 페니실린을 낳았다.


만약 우리가 AI에게 판단을 위탁해 버린다면, 우리는 영원히 '평균적인 정답'의 세계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에게 운전대를 완전히 넘겨서는 안 된다. AI가 수천 개의 매끄러운 정답을 내놓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투박하더라도 인간적인 '오답'을 골라낼 권력을 쥐고 있어야 한다.



8. 인터페이스의 진화: 설명하는 사람에서 결정하는 사람으로


마지막으로 실천적인 영역으로 넘어가 보자. 19세기 말,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말 없는 마차(Horseless Carriage)'라고 불렀다. 엔진이라는 혁신적인 동력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김새는 여전히 마차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대화형 AI(Chatbot)' 역시, 21세기의 '말 없는 마차'라고 확신한다. 생성형 AI라는 거대한 엔진을 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메신저'라는 낡은 마차의 인터페이스로 다루고 있다.


복잡한 업무를 수행해야 할 에이전트에게 텍스트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비효율의 극치다. 인간의 사고는 입체적이고 다층적인데, 이를 텍스트라는 1차원의 좁은 깔때기로 통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인터페이스는 우리를 '설명하는 사람'에서 '결정하는 사람'으로 진화시킬 것이다. 챗봇의 시대에 우리는 AI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말을 골라야 했지만, 에이전트의 시대에 우리는 AI가 펼쳐놓은 수많은 선택지와 시뮬레이션 결과 위에서 지휘자처럼 손짓하며 최선의 결과를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창의성 해킹의 완결이다. AI에게 실행을 맡기고, 준비 운동을 맡기고, 매체 변환을 맡기고, 심지어 뻔한 아이디어의 배설까지 맡긴 뒤, 인간은 오직 하나에만 집중한다.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고, 그 방향이 옳은지를 성찰하고, 마지막 순간에 결정하는 것.



결론: 손발은 내가 움직여줄 테니


실행의 시대가 가고 있다. 이제 욕망하는 능력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오는 것 같다. 기술이 우리 손에서 도구를 뺏어간 게 아니다. 오히려 묻고 있는 것이다.


"손발은 내가 움직여줄건데, 당신은 대체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더 오래된, 아니 어쩌면 영원히 오래된 질문과 마주한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


철학, 인성, 도덕. 한때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졌던 이 오래된 고민들이, 어쩌면 지금 가장 절실한 고민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구가 강력해질수록, 그 도구를 쥔 손의 방향이 중요해지니까.


답은 아직 없다. 하지만 질문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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