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낙관주의자의 도구론

2026 All-Day-Project (004/365)

byJamin

<멋진 신세계> 에 대한 글을 보고 다시 생각함.

우리는 운전대를 놓지 않는다


주어가 빠진 문장


나는 기술 낙관주의자다.


단, 이 문장에는 주어가 빠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기술을 쥔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자"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 "기술이 알아서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 믿는 종류의 낙관은 내 것이 아니다. 기후 위기도, 빈곤도, 노동의 고통도 기술이 요술봉처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낙관이 아니라 신앙이다. 신앙에는 바카라임이 없다. 그것은 <멋진 신세계>의 시민들이 고통이 닥쳐올 때마다 고민 없이 '소마'를 삼키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약이 알아서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맹신.


반면 도구를 쥔 손에는 바카라임이 따른다. 나는 그 바카라임을 회피하지 않을 인간을 믿는다. 내가 가진 낙관의 실체는 기술이라는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를 쥔 '인간'을 향한다.


진통제와 치료제, 그 너머의 '치유력'


우리는 종종 기술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만 정의한다. 맞다. 기술은 때로는 고통을 즉각적으로 없애주는 진통제가 되고, 때로는 병의 근원을 도려내는 치료제가 된다. AI가 단순 반복 노동을 대신해 주고, 신약이 질병을 정복하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하지만 진통제와 치료제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다. 노자는 말했다. "쓰임(用)은 빔(無)에서 나온다." 그릇이 쓸모 있는 이유는 그릇 자체가 아니라 그 안의 빈 공간 때문이다. 도구의 본질은 비어 있음이고, 그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오직 사용자의 의도다. 도구가 너무 강력해져서 우리가 도구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 도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그것은 그릇에 지배당하는 물과 같다.


고통은 무조건 제거해야 할 악(惡)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성장은 언제나 마찰과 근육통을 수반한다. 고민 없이 얻어진 결과에는 성취감이 없고, 갈등 없이 봉합된 관계에는 깊이가 없다. 기술이 우리 삶의 모든 비효율과 고통을 '최적화'라는 명목으로 제거해 버린다면, 우리는 과연 성장할 수 있을까?


진정한 기술 낙관주의자는 기술에게 "내 모든 고통을 없애줘"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고통을 이겨낼 시간을 벌어줘"라고 명령하는 사람이다. 약을 처방하는 주체는 기술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반론: 인간은 정말 믿을 만한가?


여기서 날카로운 반론이 들려온다.


"인간의 판단이 편향과 오류로 가득하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지 않았나? 알고리즘이 판사보다 공정하고, AI가 의사보다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인간은 감정에 휘둘리고, 피로에 무너지며, 편견에 눈이 멀어진다. '인간 주체성'은 낭만적 허구 아닌가?"


일리 있는 지적이다. 통계적으로 AI의 판단이 인간보다 정확한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 반론은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정확함'과 '옳음'은 다르다는 것.


알고리즘은 과거 데이터의 패턴을 학습한다. 과거에 반복된 것을 미래에도 반복하는 것이 '정확함'이다. 하지만 과거의 패턴 자체가 부당했다면? 편향된 데이터로 학습한 AI는 그 편향을 더 정교하게 재생산할 뿐이다. 시스템을 바꾸는 힘은 패턴의 외부에서 온다. 그리고 그 외부에 설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더 근본적으로, 실수할 권리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권리다. 실수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학습의 원료이고, 바카라임의 근거이며, 자유의 증거다. 실수할 수 없는 존재는 성장할 수도, 바카라임질 수도, 자유로울 수도 없다.


오답을 허용하는 용기: AI와 '나'


생성형 AI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나의 이러한 고민은 더 깊어졌다. AI는 확률적으로 가장 정답에 가까운,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제시하는 데 탁월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바꾼 순간들은 대개 '효율적인 정답'이 아니라, 당시에는 미친 짓 취급받던 '무모한 오답'에서 나왔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은 포도상구균 배양 접시에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실험은 '실패'였다. 효율적인 과학자라면 오염된 접시를 버리고 다시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플레밍은 곰팡이 주변에 세균이 죽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 비효율적인 호기심이 페니실린을 낳았고, 인류는 감염병의 시대를 넘어섰다.


3M의 연구원 스펜서 실버는 강력한 접착제를 개발하려다 실패했다. 그가 만든 접착제는 붙었다가 쉽게 떨어졌다. '쓸모없는' 발명이었다. 하지만 동료 아서 프라이가 이 실패작을 성가대 찬송가 바카라갈피로 사용하면서 포스트잇이 탄생했다. 실패를 버리지 않은 선택, 용도를 전환한 상상력. 이것은 알고리즘이 제안할 수 없는 경로다.


웹툰 <송곳>의 대사처럼, 꽉 막힌 시스템을 뚫고 나오는 것은 날카로운 송곳 같은 '변종'들이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비효율,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리스크 감수. 이것이 진화의 동력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이 '무지의 지'는 정답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정답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 인정이 탐구의 시작이다. AI는 "모른다"고 말하는 법을 배우기 어렵다. 언제나 가장 그럴듯한 답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르겠다, 그래서 찾아보겠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빈 공간에서 새로운 질문이 태어난다.


만약 우리가 AI에게 판단을 위탁해 버린다면, 우리는 영원히 '평균적인 정답'의 세계에 갇히게 될 것이다. 다양성이 사라진 슬롯, '최적화'된 단 하나의 길만 존재하는 슬롯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에게 운전대를 완전히 넘겨서는 안 된다. AI가 수천 개의 매끄러운 정답을 내놓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투박하더라도 인간적인 '오답'을 골라낼 권력을 쥐고 있어야 한다. 기술이 매끄러운 고속도로를 깔아줄 때, 기꺼이 흙길로 들어설 수 있는 '비판적 오답 능력'이 필요하다.


판단의 권력은 양도되지 않는다


결국 핵심은 '주체성'이다.


<멋진 신세계>가 디스토피아인 이유는 그곳이 불행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행복하다. 문제는 그 행복을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시스템이 떠먹여 주는 행복에 사육당할 뿐이다. 선택 없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그것은 마취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의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예전에는 육체적 노동을 기술이 대신했다면, 이제는 정신적 노동과 판단의 영역까지 기술이 들어오고 있다. 이때 우리가 "편하다"는 이유로 판단의 권력까지 기술에 넘겨준다면, 우리는 도구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언론의 기능, 비판의 기능, 윤리적 판단의 기능. 이 모든 것의 최종 결재란에는 'AI'가 아니라 '사람'의 도장이 찍혀야 한다. 설령 그것이 실수투성이고 비효율적일지라도 말이다. 아니, 실수투성이이기 때문에 인간의 도장이어야 한다. 실수에는 바카라임이 따르고, 바카라임에는 성찰이 따르며, 성찰에는 성장이 따르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는 법: 실천의 언어로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전대를 놓지 않을 것인가?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몇 가지 실천적 원칙을 제안한다.


첫째, 의도적 마찰을 설계하라. AI 추천을 일부러 무시하는 시간을 확보하라.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콘텐츠 대신 서가에서 우연히 눈에 띈 바카라을 집어라. 최단 경로 대신 돌아가는 길을 걸어라. 효율의 틈새에 비효율을 심는 것, 그것이 주체성을 지키는 첫 번째 방법이다.


둘째, 오답 일지를 기록하라. 효율적인 선택 대신 직관을 따랐던 순간들을 기록하라.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돌아보라. 오답의 역사가 쌓일수록, '나'라는 존재의 고유한 패턴이 드러난다. 그 패턴은 어떤 알고리즘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판단 전 자문하라. 중요한 결정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라. "이건 내가 원하는 건가, 알고리즘이 원하는 건가?" "이 선택은 나의 가치관에서 나온 것인가, 편의에서 나온 것인가?" 이 질문을 습관화하는 것만으로도 판단의 주체는 기술에서 인간으로 돌아온다.


결론: 도구를 쥔 손의 의지


나는 여전히 기술 낙관주의자다. 하지만 이제 나의 낙관론을 더 정밀하게 정의한다.


기술 낙관주의란, 기술이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선물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엄청난 힘을 가진 기술이라는 '도구'가 쥐어졌을 때, 우리 인간이 기어이 잡아먹히지 않고, 현명하게 그 도구를 휘두를 것이라는 믿음이다.

진통제도, 치료제도, AI도 결국은 도구다. 도구는 죄가 없다. 그리고 도구는 스스로 목적을 가질 수 없다. 그 도구를 어디에 쓸지, 언제 멈출지 결정하는 것은 오직 운전대를 잡은 우리의 몫이다.


자율주행차가 완벽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가끔은 창문을 열고 직접 핸들을 잡아야 한다. 효율의 고속도로가 아닌 비효율의 샛길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우리는 더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편해진다는 것과 나약해진다는 것은 다르다. 도구가 강해질수록 그것을 쥔 손의 의지는 더 선명해져야 한다.


나는 그 의지를 믿는다. 이것이 내가 기술을 낙관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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