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합된 건국 신화

2026 All-Day-Project (234/365)

byJamin

홍익인간은 어떻게 단일민족의 알리바이가 되었나

https://www.youtube.com/watch?v=uL1ATjZy2Vg

정형돈의 채널에서 누군가 무심하게 "단군의 자손"이라는 말에 물음표를 붙이는 장면을 봤다. 너무 익숙해서 한 번도 되묻지 않았던 말이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우리는 이렇게 배운다. 환웅이 내려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했고, 곰이 사람이 되어 그와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호흡으로 전해지는 이 문장 안에는 사실 서 있는 자리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앉아 있다.


이념과 혈통, 서로 다른 자리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말과 "단군의 자손"이라는 말을 나란히 놓고 보면 금방 드러난다. 하나는 행위와 이념을 정체성의 근거로 삼고, 하나는 혈통과 핏줄을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다. 하나는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열려 있고, 하나는 핏줄이 아니면 애초에 자격이 없다. 홍익인간이 가리키는 것은 국경 없는 '인간' 전체다. 단일민족 신화가 가리키는 것은 경계 있는 '우리'뿐이다.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는 사촌이 아니다. 대개는 서로의 존재를 지우면서 자란다.


이 둘을 하나의 뿌리로 배운 것은 그래서 이상한 일이다. 이념으로 사람을 모으는 방식과 핏줄로 사람을 가르는 방식은, 원래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쩌다 하나로 묶였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단군이 세운 홍익인간의 나라"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건 두 개념이 원래 하나였기 때문이 아니라, 특정 시기에 필요에 의해 서로에게 기대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뿌리를 증명할 방법이 필요했다. 독립운동가들은 단군을 불러왔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원래부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던 위대한 이념을 가졌다"는 문장으로, 혈통의 서사에 이념의 무게를 얹었다. 해방 이후 국가를 재건하는 시기에는 반대의 필요가 있었다. 흩어진 국민을 하나로 묶을 구심점이 필요했고, 이번에는 혈통적 동질성이 앞에 서고 홍익인간이 그 뒤에서 "이것이 우리의 건국이념"이라는 정당성을 빌려주었다.


방향은 시대마다 바뀌었지만 구조는 같았다. 매번 특수한 것(혈통, 민족)이 정당성을 필요로 할 때마다 보편적인 것(이념, 홍익인간)이 불려 나와 옷을 입혀 주었다.


홍익인간은 단일민족 신화의 뿌리가 아니라, 그 신화가 아쉬울 때마다 빌려 입은 외투였다.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흥미로운 것은 신화 자체가 이미 이 봉합의 이음매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단군의 어머니는 원래 인간이 아니었다.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백 일을 견뎌 사람이 되었다. 혈통의 출발점 자체가 이미 변신이다.


혈통을 정체성의 근거로 삼으려는 순간, 신화는 스스로 발목을 잡는다. 순수한 핏줄을 증명하고 싶다면 그 첫 장부터 다시 써야 한다. 반대로 정체성을 변신과 되어감의 문제로 읽는다면, 이 이야기는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쪽을 가리킨다. 곰이 사람이 되었듯, 이 땅에서 정체성을 얻는다는 것은 태어난 핏줄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견뎌내는 일에 가깝다는 것.


버릴 것과 다시 쓸 것


지금 한국은 이미 200만 명이 넘는 외국인 주민과 함께 사는 슬롯다. 순혈이라는 서사는 통계 앞에서 무너진 지 오래고, 애초에 역사적으로도 순혈이었던 적이 없다. 버릴 것은 명확하다. 혈통을 근거로 삼는 단일민족 신화다. 이건 오늘의 현실과 부딪히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신화 안에서도 성립하지 않던 이야기였다.


살릴 것도 있다. 예전에 나는 [[모듬살이를 위한 새로운 계약]]에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옛 지혜를 "널리 생명을 이롭게 하라"로 확장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대상을 넓히는 데 집중했다. 오늘 다시 이 개념을 붙들고 보니, 먼저 손봐야 할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근거였다. 누구를 이롭게 할 것인가를 넓히기 전에, 무엇을 근거로 '우리'를 정의할 것인가부터 바꿔야 한다. 핏줄이 아니라 이념으로, 태생이 아니라 행위로.


그렇게 되면 홍익인간은 단일민족 신화의 정당화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개념이 된다. 이 땅에서 함께 살고, 함께 이롭게 하려는 사람이라면 핏줄과 무관하게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이념. 혈통 공동체가 아니라 시민적 연대.


문장을 다시 나누며


교실에서 배운 그 한 문장으로 돌아가 본다. 환웅이 내려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했고, 곰이 사람이 되어 그와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 이제는 이 문장을 하나의 호흡으로 읽지 않는다. 앞부분은 오늘도 유효한 이념이고, 뒷부분은 그 이념이 한때 빌려 입었던 혈통의 옷이다.


옷은 벗어도 된다. 그 안의 몸은 여전히 쓸 수 있다.


단군의 핏줄이라는 신화는 역사바카라 속에 남겨두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이념만 꺼내 다시 입힐 수 있다면, 그 순간 이 오래된 문장은 배타적 신화에서 벗어나 우리가 여전히 참고할 만한 원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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