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김치 냉장고와 이별 후 새 김치 냉장고와 만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오늘 하루의 일정을 생각한다.
'오전 일찍 김치 냉장고 배달이 온다고 어젯밤 전화가 왔지.'
그 생각이 나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날처럼 느긋하게 뭉그적거릴 시간이 없다. 냉장고가 들어갈 자리를 미리 정리해 놓아야 한다.
내 방 베란다가 새 김치 냉장고가 놓일 자리다. 평소에는 정리되어 있어 별로 짐이 없어 보였는데, 하나씩 꺼내 놓기 시작하니 왠 짐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이사할 때와 똑같다.
살림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을 때는 집안에 물건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하나씩 꺼내 놓으면 어디서 이렇게 많은 물건이 나왔나 싶다.
나는 남편의 눈치를 살핀다. 그런데 남편은 도와줄 기색이 전혀 없이 소파에 앉아 티브이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다.
'그래, 혼자 해보는 거야.'
체념하고 혼자서 천천히 짐을 꺼내 옮긴다. 며칠 전부터 허리가 좋지 않아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치료를 받고 있는 남편에게 굳이 일을 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남편은 내년이면 아흔의 나이다. 나와는 살아가는 생각의 간극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나이에 살림을 늘리면 어떻게 하냐. 이제는 있는 것도 버려야 할 나이인데 그냥 견뎌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김치 냉장고가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지, 부엌살림에 문외한인 남편이 어찌 알겠는가. 답답한 마음에 항변해 보지만, 돌아오는 말은 목소리만 커진다. 상대를 배려하기보다는 자기주장만 앞세우는 남편이 그럴 때면 섭섭하고 밉기도 하다.
무엇보다 고장 난 김치 냉장고에서 꺼내 놓은 음식과 저장해 두었던 식품들은 또 어쩌란 말인가. 부엌에서 사용하고 있는 냉장고에 임시로 넣어두는 것도 한계가 있다. 넣을 수 있는 만큼 억지로 욱여넣다 보니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식품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스트레스다.
결국 딸들이 있는 카톡 방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잠자고 있던 카톡 방이 그때부터 요란해졌다. 딸들은 저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막내딸은 백화점 매장까지 직접 살펴보고 시장 조사까지 했다.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느라 한바탕 난리 법석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선풍기 목이 떨어져 제 기능을 못 한다. 그 말을 듣고 둘째 딸이 선풍기를 주문했다는 톡을 보내온다. 나중에 막내딸까지 선풍기를 보내와 갑자기 새 선풍기가 두 대가 되었다. 딸이 사용해 본 결과 김치 냉장고는 스탠드 형이 좋다고 한다. 나도 한번 써 볼까 싶어 슬쩍 관심을 보였더니, 그 제품은 10월이 되어야 입고된다고 한다.
새로 산 김치 냉장고 새로운 인연으로 온 김치 냉장고와 고장 난 김치 냉장고
당장은 별도리가 없다 예전과 같은 모델로 사야지. 그렇게 지난주 금요일 주문한 냉장고가 우리 집에 도착했다. 몇 시간 동안 혼자 짐을 정리하고 부엌 냉장고까지 깨끗이 청소하고 나니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른다. 그러면서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본다.
두 부부만 사는 집안에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들어 저장해 놓고 살았다. 이제는 조금씩 가볍게 살아야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먹는 식품에도 유통기한이 있듯이 세상을 모든 물건에도 저마다 유통기한이 있다. 언젠 가는 낡고 고장 나서 버려지는 물건이 된다.
어느 날, 우리 인간도 때가 되면 이 세상과 이별해야 한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엄숙한 진리다.
아흔을 바라보는 남편과 아직 팔십 대인 나.
같은 집에 같은 밥을 먹고 살아가지만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부부이면서도 때로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상대를 바꾸려고 하기보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함께 늙어가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15년이 넘도록 우리 집에서 함께했던 김치 냉장고와는 이제 이별이다. 오랜 세월 우리 가족의 먹거리를 지켜주었던 냉장고를 떠나보내고, 오늘 새롭게 우리 집에 돌아온 새 김치 냉장고와 또 다른 인연을 시작한다. 아직 정을 붙이지 않아서일까, 새로 들어온 김치 냉장고가 낯설다. 이별해야 하는 고장 난 냉장고에 눈길을 한 번 더 준다.
물건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생각은 사람의 삶으로 이어진다. '회자 정리'세상 모든 사물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이별 뒤에는 또 새로운 만남이 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 인가를 떠나보내야 새로운 것을 맞이할 수 있고, 익숙했던 것과 작별해야 또 다른 인연을 받아들일 수 있다. 오늘 나는 오래된 김치 냉장고 하나를 떠나보내며 또 다른 이별을 맞는다. 이별은 아프고 만남은 기쁨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