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라는 질병 너머

"아무리 아프게 성찰하고, 그래서 성숙해져도, 여전히 어떤 결여가 남는다."


온몸으로 철학을 하던 어느 날, 이 삶의 진실을 깨달아버렸다. 잠시의 평안 뒤에,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고, 더 고통스러워졌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나에게 펼쳐진 삶의 고통이 말끔히 치유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더 지났을까? 혼란과 고통이 잦아들고, 또 다른 평안이 찾아왔다.


"인생은 윗돌 빼서 아랫돌을 괴는 일이구나"


이 기쁨의 깨달음을 언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이 있지만, 하루하루 작은 ‘빚’을 갚아나가는 삶 자체에서 의미를 찾은 평온이라고 할까. ‘빚’을 모조리 갚아야만 평온을 느낄 수 있는 이들에게 그 기쁨의 깨달음을 설명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아무리 애써도 우리의 마음에는 또 다른 결여가 남는다. 이는 어쩌면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결여일지도 모른다. 아마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늘 종교(영원)와 예술(모순)이 함께 한 이유였겠지. ‘나’도 ‘너’도 그런 결여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삶이 늘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느 천재 철학자의 말처럼, 철학은 질병이 된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철학이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결여를 발견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그래서 철학을 불필요한 것을 너머 유해한 것이라고 말하지. 모지리들. 철학이 질병이 되는 건, 철학을 통해 발견된 결여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 앞에서도 건강하고 유쾌한 삶은 가능하다. 결여는 그대로 있지만, 그 결여를 결여대로 둔 채 다음 삶을 이어 나가는 건강함과 유쾌함이 있다. 언젠가 영원한 ‘결여’를 발견하는 순간이 올 테다. 그 영원한 결여를 발견하게 되었다면, 시선을 돌려, ‘지금’을 살면 된다.


윗돌을 빼서 아랫돌을 괴는 ‘지금’, 결여는 없다. ‘지금’ 모든 것이 가득 차 있다. 살아 있을 때, 건강하게 살자. 죽을 때도 그렇게 죽으면 된다. ‘지금’ 살고, ‘지금’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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