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의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지역 밀착형 리테일러, H-E-B
넓은 땅덩어리만큼 다양한 리테일러가 존재하는 미국.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월마트처럼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리테일러가 있는 반면, 특정 주를 대표하며 지역 주민들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로컬 리테일러'가 따로 존재한다.
텍사스에 오기 전까지 이름조차 생소했던 H-E-B가 바로 그런 곳이다.
미국에 온 지 1년 반. 월마트는 손에 꼽을 정도로 방문했지만, H-E-B는 매주 한두 번은 꼭 들르는 생활 속 필수 코스가 되었다. 근처에 월마트가 없는 것도 아니요, 거리 차이가 큰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자연스럽게 H-E-B를 찾게 되었을까?
한국에서 오랜 시간 MD로 일하고, 쇼핑에 나름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내가 H-E-B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신선식품이다.
H-E-B는 채소, 과일, 육류 코너가 특히 강하다.
종류도 다채롭지만 무엇보다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하다. 텍사스에 특화된 리테일러답게 육류 코너는 특히 인상적인데, 육류의 선택지가 넓고 신선도와 품질이 훌륭하다.
매장이 주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동네 월마트는 필요한 물건을 빠르게 사기에는 참 편리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계적인 분위기가 느껴져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이라는 인상은 없다. 저렴한 생필품을 효율적으로 구매하기 위한 장소랄까.
반면 H-E-B 직원들은 친근하고 매장은 활기가 넘친다.
키즈 데이에는 아이들을 위한 행사를 진행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매장 안에서 산타와 사진을 찍는 이벤트가 열리기도 한다. 쇼핑 경험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이러한 차이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재미있는 점은 H-E-B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텍사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H-E-B는 단순한 마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다른 주로 이사 간 텍사스 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로 H-E-B를 꼽을 정도다.
왜 세계 최대 유통기업인 월마트도
텍사스에서는 H-E-B를 완전히 이기지 못할까?
답은 간단하다.
H-E-B는 누구보다 텍사스 사람을 잘 이해하는 마트이기 때문이다. H-E-B의 힘은 단순한 상품 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이해하는 깊이에서 나온다.
월마트가 미국 전체의 평균적인 소비자를 바라본다면, H-E-B는 텍사스라는 지역과 그곳에 사는 고객에게만 집중한다.
텍사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메뉴 BBQ를 예로 들어보자.
물론 월마트에서도 브리스킷과 유명 브랜드의 BBQ 소스를 살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장 표준적이고 무난한 구성에 가깝다.
반면 H-E-B의 정육 코너는 텍사스 BBQ 애호가들의 천국이다. 고기는 초이스, 프라임, 아메리칸 와규, 호주산 와규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고, 바로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텍사스식 스파이스로 시즈닝 한 제품도 다양하다. 매장에 상주하는 정육 직원에게 원하는 두께나 부위로 손질을 요청할 수도 있다.
BBQ 소스 코너에는 텍사스 곳곳의 로컬 BBQ 맛집 소스부터 다양한 스타일의 제품이 진열되어 있고, 바비큐와 함께 곁들일 텍사스 토스트와 주류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단순히 고기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텍사스 사람들이 즐기는 BBQ 파티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 맞춤형 전략은 텍사스에 깊이 뿌리내린 멕시칸 식문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텍사스는 멕시코계 주민의 비중이 높고, 음식과 문화 역시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H-E-B는 타코, 살사, 토르티야, 멕시칸 치즈 등 멕시칸 식재료를 일반적인 미국 마트보다 훨씬 다양하고 깊이 있게 갖추고 있다.
텍사스 사람들이 무엇을 사러 왔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필요한 상품을 제안한다.
그것이 내가 H-E-B를 보며 감탄하는 지점이다.
H-E-B의 로컬 밀착 전략은 숫자로도 증명된다.
H-E-B는 텍사스 식료품 시장 점유율에서 약 50%를 차지한다. 오스틴이나 샌안토니오 같은 텍사스 주요 도시에서는 2위인 월마트를 두 배 이상의 차이로 따돌릴 정도다.
또한 텍사스와 멕시코 북부에만 집중하면서도 연간 매출은 약 500억 달러, 한화로 65조 원에 달해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 비상장 기업 상위 5위에 해당한다.
심지어 미국 전국 단위 식료품 리테일러 평가에서는 코스트코, 아마존, 월마트, 트레이더 조 같은 거대 공룡들을 제치고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마트 1위에 수차례 오르기도 했다.
H-E-B의 PB(자체 브랜드)의 역할도 독보적이다.
가격 경쟁력은 기본이고 브랜드 라인마다 역할과 포지션이 정교하게 분리되어 있다. 가성비를 강조한 '힐 컨트리 페어'부터 프리미엄 감성을 담은 '센트럴 마켓', 바쁜 현대인을 위한 간편식 라인인 '밀 심플'까지 고객의 상황과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세분화되어 있다.
PB 상품 품질에 대한 소비자 신뢰도 매우 높다.
그래서 텍사스 사람들에게 H-E-B PB는 저가 제품이 아니라 믿고 고르는 하나의 고유 브랜드에 가깝다. 고객이 반복해서 구매하게 만들고 마트 자체의 팬덤을 강화하는 이상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H-E-B와 텍사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2021년 겨울, 텍사스에 기록적인 한파와 대규모 정전 사태가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이상 기온으로 도시 전체가 마비되고 많은 사람들이 물과 생필품을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자연재해로 H-E-B 역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최대한 공급망을 유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고, 식품은행과 협력해 텍사스 곳곳에 물과 구호물자를 공급했다.
평소에는 장을 보는 마트였던 공간이, 위기의 순간에는 우리 동네를 지켜주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많은 텍사스 사람들에게 H-E-B는 단순한 상점을 넘어 어려운 순간에도 함께했던 의리의 브랜드로 기억되었다.
결국 H-E-B가 사랑받는 이유는 텍사스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가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깊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월마트가 규모의 힘으로 미국 전체 유통을 지배했다면,
H-E-B는 지역을 이해하는 밀도 높은 힘으로 텍사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내가 매주 월마트 대신 H-E-B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도 비슷하다.
내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텍사스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가 매대 위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가장 가깝고 세심하게 텍사스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마트.
그것이 H-E-B가 오랜 시간 텍사스 사람들의 일상 속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비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