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맛 선택부터 마트 진열대까지, 취향을 존중하는 미국의 소비문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아파 처음 병원을 찾았다.
진료를 마친 의사는 종이 처방전을 건네는 대신 어느 약국으로 갈 것인지 물었다. 근처 대형마트 안에 있는 약국 이름을 대고 차를 몰았다. 내 손에는 종이 한 장 들려 있지 않았지만, 약국 시스템에는 이미 아이의 처방 정보가 도착해 있었다.
드라이브스루 약국이라 차에서 내릴 필요도 없었다. 종이 처방전 없이 병원과 약국이 연결되는 시스템도 신기했지만,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어떤 맛으로 조제해 드릴까요?
약사는 포도, 체리, 망고, 블루베리, 코튼캔디가 적힌 메뉴판(?)을 내밀었다. 아이가 포도 맛을 고르자 처방약 라벨에는 ‘Flavor: Grape’가 선명하게 적혀 나왔다.
평소라면 약 먹기를 한참이나 피해 다녔을 아이도 그날만큼은 군말 없이 약을 삼켰다.
아플 때 먹는 처방약의 맛까지 고를 수 있다니.
미국의 ‘개인 취향 존중’ 문화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과연 이 나라에서는 어디까지 커스텀이 가능할지 궁금해졌다.
그 후 미국 생활 곳곳에서 비슷한 장면들을 마주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흔해진 스타벅스 음료 커스텀은 기본이고, 햄버거와 피자는 도우부터 속 재료까지 전부 직접 골라 주문한다. 자동차 번호판과 집 앞 사인(Sign) 판에 원하는 문구를 새기는 것은 물론, 텀블러와 가방에도 당연하다는 듯 이름을 새겨 넣는다.
인형 커스텀 매장인 ‘빌드어베어(Build-A-Bear)’에서는 아이가 직접 인형 피를 고르고, 안에 넣을 솜의 양을 정한 뒤, 옷과 신발까지 손수 골라 입히며 세상에 하나뿐인 인형을 만든다.
미국에서 기념일마다 찾게 되는 선물 플랫폼인 ‘엣시(Etsy)’에서도 본인의 이름이나 기념일이 각인된 타월, 가방, 파우치 등이 늘 인기 순위를 차지한다.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 중 하나를 고르는 것보다, 나에게 딱 맞게 바꾸고 길들이는 일을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이랄까.
이러한 세분화된 기호와 취향은 기성품의 다양한 선택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한국에서 상품기획자(MD)로 일했던 내게 미국의 마트는 매번 도파민이 터지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상품이 참 많다’ 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마트를 드나드는 시간이 쌓일수록 눈에 들어온 것은 단순한 가짓수가 아니라 상품의 ‘깊이(Depth)’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신선식품 매대다. 사과 종류만 해도 식감과 당도에 따라 10가지가 넘게 쌓여 있고, 감자 역시 요리 용도에 맞게 서너 가지가 기본으로 나뉘어 있다.
치즈 코너로 넘어가면 그 깊이가 더 뼈저리게 느껴진다. 한국 일반 마트에서는 슬라이스 치즈나 모차렐라, 체더 정도가 익숙하다면, 이곳에는 브리, 카망베르, 고다, 고트 치즈처럼 종류만 해도 셀 수 없이 많다.
심지어 같은 체더치즈 안에서도 숙성 기간에 따라 Mild, Sharp, Extra Sharp로 촘촘하게 나뉜다. 생전 처음 보는 살구 크림치즈나 블루베리 체더치즈를 보고 있으면 ‘치즈의 세계가 이토록 깊을 수 있구나’ 감탄하게 된다.
샴푸나 바디 제품도 모발 타입과 원하는 성분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고, 과자나 가공식품 역시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거의 모든 카테고리에서 나의 식습관, 건강 상태, 라이프스타일에 부합하는 ‘디테일한 한 끗’을 가진 제품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MD로 일할 때는 이런 상품 구성을 기획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시장 자체의 규모 차이도 있었지만, 소비 시장이 그만큼 세분화되어 있지 않은 탓이 컸다.
카테고리마다 편차는 있지만, 대개 매출의 50%에서 많게는 80~90%가 가장 대중적인 인기 상품(베스트셀러) 몇 개에서 나온다.
물론 다양한 취향을 고려해 상품 가짓수(SKU)를 늘리면 고객의 선택지는 넓어진다. 하지만 최소 생산 수량(MOQ) 대비 판매량이 받쳐주지 못하면 그 화려한 구색은 결국 고스란히 재고와 손실이 되어 돌아온다.
평균적인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표준’이 가장 안전하고 중요한 시장이었기에, 한국에서는 다양성을 유지하는 일 자체가 큰 모험이었다.
미국 유통사들 역시 나름의 치열한 재고 고민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시즌엔 어떤 상품을 잘라내야(Cut) 하나”를 뼈아프게 고민했던 MD로서, 이토록 무궁무진한 상품을 마음껏 기획하고 운영해 볼 수 있는 미국의 유통 환경은 참 부러운 영역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한국도 취향이 빠르게 세분화되는 중이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마주한 이들이 인상적이었던 건, 자신의 기호를 아주 선명하게 인지하고 이를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힘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결국 미국의 커스텀 문화는 단순히 '선택지가 많음'을 뜻하지 않는다. 내 취향이 뭔지 끈질기게 묻고, 서로 다른 취향의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깝다.
사실 상품을 개발하는 나조차도 종종 ‘선택지가 딱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느낀다. 매번 질문을 마주해야 하는 주문 방식은 피곤하고, 그냥 대세에 묻어가고 싶은 날도 많다.
하지만 늘 표준에 맞춰 살던 내가 이곳에서 비로소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이지?"라는 사소한 고민을 더 자주 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귀찮더라도 내게 가장 좋은 것을 고민하는 이 과정들이 모여 결국 나다운 일상을 만든다. 그리고 상품을 기획하는 일을 하던 내게, 이토록 깊은 시장의 세계를 경험해 보는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값지다.
다양한 선택지 안에서 각자의 취향이 물 흐르듯 존중받는 문화.
미국의 커스텀이 흥미로운 이유는 특별한 철학 때문이 아니다. 그저 일상의 작은 선택들 속에서 “나에게 맞는 답”을 찾는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문화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