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인간이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bystephanette
문득 믿음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강연을 봤다.


이 글은 ITAL 310: Dante in Translation, 주세페 마초타(Giuseppe Mazzotta) 교수 강의 중 21강, 『신곡』 천국편 24·25·26곡 중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마초타 교수는 꽤 유명한 단테 연구자다. 예일대 Sterling Professor Emeritus이고, 단테·보카치오·페트라르카·비코 등 이탈리아 문학과 사상사를 폭넓게 연구해 온 학자다. 이 강좌는 『신곡』 전체를 지옥편부터 천국편 끝까지 24강으로 훑는 공개 대학 강좌라서, 단테를 제대로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오래 찾아보는 콘텐츠다.


믿음은 공동체적 맥락에 놓아야 한다. 천국편 24곡의 시작에는 잔치와 음식, 광야의 만나와 종말론적 연회가 함께 겹쳐져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중세의 믿음 해석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믿는다는 방향이다.

단테는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이성은 내가 아는 것의 범위를 보여주고,
믿음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게 한다.

나는 여기까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계가 내가 아는 범위와 동일하다고 말할 근거도 없다.

만약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알 수 있다면 애초에 믿음은 필요하지 않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 지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 자체는 하나의 앎의 방식(mode of knowledge)이다.

철학은 이성의 규칙 안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믿음은 이성만으로는 볼 수 없는 어떤 차원을 보게 한다.

둘은 같은 지식이 아니지만, 둘 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과학은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한다.

철학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다.

믿음은 내가 완전히 증명할 수 없는 것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를 다룬다.


믿음은 불확실성과 관계를 맺는 능력이다.




믿음은 의심을 포함한다.

단테의 신곡에서 베드로는 믿음의 시험관으로 등장하여 영혼들이 구술시험을 치르게 한다.

베드로는 믿음에 대해 의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믿음의 위기는 곧 믿음의 부정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의심하고 흔들리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믿는 변증법적 움직임 속에 있다.

믿음의 고백과 의심 사이에 움직임이 있다.

믿음을 완전한 확신으로만 정의하면 흔들리는 순간 믿음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의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음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 것을 다시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베드로가 단테에게 "너 자신을 선언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장면에서 지식은 단테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보이게 만든다. 즉, 믿음은 내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문제다. 그러므로 믿음은 존재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동전의 비유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아주 중요한 비유다.

베드로는 단테가 믿음을 잘 설명하자 이런 식으로 묻는다.

“좋다. 네가 그 동전의 무게와 순도를 잘 설명했다. 그런데 그 동전을 실제로 네 지갑에 가지고 있느냐?”

즉, 믿음을 설명할 줄 아는 것과 실제로 믿는 것은 다르다.

이건 굉장히 날카로운 질문이다.

믿음의 정의를 외울 수 있고, 신학을 잘 설명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변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믿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너는 실제로 그것을 가지고 있느냐?”

그래서 단테에게 믿음은 지식이면서 동시에 실존적 소유다.

동전은 주머니 안에만 있으면 쓸모가 없다.

동전은 실제로 타인을 만나 주고받으면서 그 가치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믿음도 공동체 안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동전의 비유에는 몇 겹의 의미가 더 있다.

동전은 가치가 있고,
위조 여부를 검사할 수 있고,
순도가 있고,
무엇보다 순환한다.

믿음도 이와 같이 세상 안에서 움직이며 가치의 기준을 만든다.

여기서 믿음은 신뢰의 의미까지 확장된다.

믿음은 사람들이 함께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신뢰라고 말한다.




마초타의 강의를 들으며 나는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했다. 동전의 비유는 정말 멋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신뢰 위에 구축된 체제다.
금본위 이후 돈은 믿음이 없다면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공동체 안에서의 믿음이 슬롯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흔히 가격과 교환의 체제로 보지만, 그 밑에는 거대한 신뢰의 인프라가 깔려 있다. 금본위제에서는 화폐가 금이라는 물질적 기준에 기대고 있었지만, 현대의 법정화폐는 그 자체로는 종이나 전자기록이다. 그 돈이 작동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것을 다른 사람도 받아줄 것이다”, “국가와 금융시스템이 이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약속이다.


단테의 믿음-화폐 비유에서 돈이 가치가 있고, 진위와 순도가 있으며, 무엇보다 순환하면서 공동체 안의 가치체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을 짚었다. 자본주의도 거의 같은 구조를 가진다.


은행 예금은 모두가 한꺼번에 현금으로 바꾸려 들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위에 있고,
대출은 미래의 상환 가능성에 대한 믿음 위에 있고,
주식은 기업의 미래 수익에 대한 기대 위에 있고,
채권은 발행자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신뢰 위에 있고,
계약은 상대가 미래에도 동일한 규칙을 따를 것이라는 믿음 위에 있다.

즉, 자본주의는 미래의 약속을 현재의 가치로 바꾸는 체제다.


그래서 신뢰가 무너지면 가격보다 먼저 시스템이 흔들린다. 뱅크런이 대표적이다. 돈이 실제로 없어져서가 아니라, “저 은행이 내 돈을 돌려줄 것이다”라는 공동의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사람들이 동시에 행동하고, 그 행동이 실제 위기를 만든다.


자본주의는 믿음의 제도화다.
화폐는 공동체가 승인한 신뢰의 표식이고,
신용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현재의 교환가치로 바꾸는 장치다.

믿음은 정보 부족 상태에서 시스템을 정지시키지 않는 장치다.


이것은 꽤 재미있는 역설이다.

자본주의는 굉장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체제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 기반에 보이지 않는 것—신뢰, 기대, 약속, 미래—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경제는 생각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이다.




단테의 믿음은 종교를 넘어서 확장된다.

사람과 사람이 계약을 맺는 것,
누군가의 말을 믿는 것,
미래를 계획하는 것,
사랑하는 것,
슬롯 안에서 함께 사는 것.

이 모든 데에는 완전한 증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나는 상대가 내일 약속을 지킬지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믿어야 관계가 가능하다.

나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인간의 삶에는 늘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전제로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믿음의 구조다.


그리고 그래서 믿음과 그다음 장에 나오는 희망이 서로 연결된다.

믿음이 내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세계가 끝난 것은 아니다라면,

희망은 그러므로 미래도 아직 닫히지 않았다는 의미다.

믿음과 희망은 서로 분리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사랑은 다시 이 둘을 모은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다.
확신이 불가능한 자리에서도 관계를 끊지 않는 능력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 태도다.
믿음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절망일지도 모른다.
의심은 계속 질문하게 하지만, 완전한 절망은 질문 자체를 끝내버리기 때문이다.
믿음은 알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어도 관계나 판단을 계속 가능하게 하는 작동 방식
즉, 불확실성을 견디게 하는 인식의 장치다.
믿음은 지식의 공백을 견디면서도 세계와의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방식이다.

단테의 믿음은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지식으로도 어떻게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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