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면 밤마다

어린 밤 어른의 밤

by최물결


내게 어릴 적 밤은 무서운 심연의 시간이었다. 밝은 낮이면 친구들과 자전거도 타고 놀이터에서 놀 수 있었지만 밤이면 나가지 못했기에 아쉬움의 순간이었다. 풍경들을 덮는 밤은 항상 낯설었다. 특히 주말 밤이면 티브이를 틀면 전설의 고향, 토요 미스터리, 이야기 속으로 등 미스터리 공포물들이 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파란 빛깔의 소복 입은 귀신이 다가오면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는 한쪽 눈을 감으며 리모컨 버튼을 눌러 채널을 바꾸려고 하다가도 이야기가 재미있어 다시 돌려보곤 하였다. 그때 한창 피아노 학원에서는 빨간 마스크라는 귀신에 대해서 아이들끼리 열띤 토론이 열렸다. 비 오는 날이 되면 빨간 마스크라는 귀신이 나타나는데 혈액형 별로 사람의 입을 찢어 놓는다고 하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도 피아노를 치다 말고 귀신 이야기를 하는 친구 대열에 합류해 귀를 열었다. 아이들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종알종알 말하기에 바빴다. 잠시 후 내 심장이 철컹 내려앉았다. 빨간 마스크는 A형의 입을 제일 많이 찢는다는데 하필 내가 A형이었다. 팔 년 산 꼬마였던 나는 왜 하필 그 많은 혈액형 중 내가 에이형일까 라며 크나큰 걱정을 했다. 하필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한자로 개 견자를 쓰면 안 찢을 수도 있데’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무사히 빨간 마스크를 만났을 때 도망칠 수 있는지 방법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목소리마저 끊긴 밤이다. 엄마 아빠는 회사에 갔다 와 씻고 조용히 티브이를 본다. 눈꺼풀이 무거운 내가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다가 몸을 뒤척인다. 그런데 잠이 안 와 자꾸만 움직인다. 눈을 떴는데 사방이 어두웠다. 무서울 때면 나는 안방으로 와 엄마 팔을 꼭 끌어안았다. 엄마의 팔을 입까지 가지고와 살 냄새를 맡으며 잠을 청하곤 했다. 엄마는 미동이 없었다. 하루 종일 지친 몸을 뉘인 엄마의 색색대는 숨소리만 들렸다. 시계 분침과 초침의 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왔다. 똑딱똑딱, 잠이 안 오니 며칠 전 봤던 전설의 고향에 나왔던 귀신 얼굴이 떠올랐다. 어린 초등학생에게 밤은 또렷한 것에 가려져 무서운 시간이었다.

20년이 흐른 지금의 밤은 은밀하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컴퓨터를 켜고 글을 쓰고 있는 새벽 집중이 제일 잘 되는 시간이다. 며칠 전 혹은 어린 시절 있었던 일들을 더듬어 한 자 한 자 회상해본다. 시끄러운 소리들이 사라지고 오롯이 나 혼자 바카라상 앞에 앉을 수 있는 나만의 시간. 나는 밤의 이 분위기를 사랑한다. 어릴 적 낮에 있었던 일들이 마냥 즐거웠던 것이라면 어른이 된 날들은 마냥 즐거울 수 없었다. 발표하다 실수한 날, 사귀던 남자애한테 찌질하게 굴던 날, 차인 날, 사수한테 된 통 깨진 날……. 아프고 쓰디쓴 하루하루들이 밤마다 그 모습을 가려주었다. 금요일 밤이면 한 잔 술에 달큰하게 취해 일주일의 힘든 일들을 쓸어 넘기기도 하고 불을 다 끄고 방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잠들기도 하는 그런 밤. 어린 나의 밤과 어른이 된 밤은 같은 공간의 밤이지만 그 모양은 달랐다.



그렇게도 귀신을 무서워했던 나, 초등학생의 나는 공포가 많은 아이 었다. 하루는 도둑을 잡는 공개수배사건 24시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가스밸브를 타고 남의 집에 침입하는 강도를 다룬 것이었는데 우리 집에 저런 사람들이 오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에 그날부터 문단속을 철저하게 했던 것 같다. 밤이면 밤마다 나는 우리 집을 지키는 안전요원이 됐다. 여름이면 문을 열어놓아 시원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도록 내버려둘 법도 한데 나는 9시면 여차 없이 문을 봉쇄했다.

서른 살을 넘긴 지금 밤이면 밤마다 어린 시절 내 모습을 기억해서 펜으로 잡아두려고 애쓴다. 그 시절 생각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지금 바라보았을 때 나는 어떠했는지, 또 그때는 어떠했는지 기억을 쓴다. 지금과는 다른 느낌의 밤, 무서운 밤과 익숙한 밤이지만 그 사잇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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