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를 위하여>

by깊은 바다

영롱한 달걀노른자를 터뜨려 선홍빛 육회와 야채를 신나게 비비고 있을 때, oo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분명 나를 향한 질문이었다.


​"황 과장, 부안에 맛집 아는 데 있으면 소개 좀 해줘 봐."


​두 달 전 온 내가 아는 부안의 맛집 대부분은 oo님의 추천으로 알게 된 거였다. 그런 분이 내게 맛집을 물으신 건, 나의 온라인카지노 글을 읽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입은 육회비빔밥을 맛있게 씹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자기 검열 모드에 들어갔다.


00님은 내 글에 익명의 상사로 한두 차례 등장했다. 다행히 비중도 작았고, 험담을 하거나 욕을 먹을 만한 내용도 없었다.


이내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렇다고 모든 신경을 훌훌 털어 버린 것도 아니었다.


​오후에 00실에 들렀다. 어쩌면 그냥 무심코 던지신 말씀에 혼자 지레짐작 겁을 먹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 과장은 무슨 그런 쓸데없는 글을 쓰고 그래?’


만약 이런 일침이 날아온다면 일이 꽤 복잡해질 터였다.


​00님은 허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우연히 글을 검색해 읽었는데, 글쓴이가 딱 황 과장 같았다고.


부안이라는 좁은 동네에서 동료 직원의 글을 알아채는 건 셜록 홈즈가 아니더라도 쉽게 추리해 낼 수 있는 간단한 사건이었을 테다. 00님은 짬을 내어 부안 맛집 여러 군데를 더 추천해 주었다.


필력이 참 좋다는 기분 좋은 칭찬과 함께.


​내가 온라인카지노에 쓰는 글의 소재는 소소하다. 퇴근길 찌개 끓는 소리를 담은 맛집 이야기, 아이들을 키우며 일어난 소란스러운 일상, 일터에서 겪는 애환 같은 것들이다.


​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를 ‘수필’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틀에 담아 세상과 나누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가 많다.


나의 소소한 신변잡기가 타인의 귀중한 시간을 뺏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가끔은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가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가족들 카톡방에 아들의 입시 이야기로 쓴 글을 공유해 보았다.


​​평소 바카라이라고는 멀리하던 딸아이의 반응도 궁금했다. 과연 아빠의 지루한 글을 읽기나 할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딸아이는 온라인카지노에 올린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아빠, 원래 남의 일기장 읽는 게 제일 재미있는 거 몰라요?"


하긴, 나도 네 일기를 훔쳐볼 때가 재미있었지.


​그 무심하고 장난스러운 한마디가 가슴을 툭 쳤다. 딸아이에게 아빠의 글은 잘 정제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아빠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루를 견디고, 무엇을 고민하며,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고스란히 담긴 '가장 재미있고 진솔한 일기장'이었던 것이다.


​문득 몇 년 전 읽었던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가 떠올랐다.


​윌리엄 스토너. 그 역시 거대한 역사의 영웅도, 시대를 흔든 위인도 아니었다. 미주리주의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평생 대학 교정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강의하고, 치사한 온라인 게임 내 권력 다툼에 밀려나고, 서툰 사랑을 하고, 딸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 조용히 잊혀간 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바카라 한 권은 도서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썼고, 그가 떠난 자리엔 아무런 족적도 남지 않았다.


​스토너를 떠올리자 온라인카지노 글쓰기의 고민은 쉽게 사라졌다. 스토너가 대학 교정에서 겪은 일은 내가 매일 출근하는 일터에서 일어나는 일과 다를 바 없었고, 그가 딸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 아련한 마음은 내가 우리 아이들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쉬던 그 순간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세상을 떠나 먼 훗날 저세상으로 가고 나면, 나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거두어들인 성공의 숫자가 아닐 것이다. 훗날 나의 아이들이, 혹은 우연히 내 글을 발견한 어느 외로운 독자가 내 수필을 읽으며 확인하게 될 것은 ‘한 인간이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견디고 사랑했는가’하는 그 온기의 흔적일 터다.


​"원래 남의 일기를 읽는 게 가장 재미있다"는 딸아이의 말처럼, 나의 사적이고 솔직한 기록이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비록 명작이라 부르기엔 한참 모자란 졸작(拙作)이지만, 이 세상에 다녀간 나라는 사람이 써 내려간 단 하나의 소설이기에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를 바라볼 뿐이다.


​오늘 밤도 나는 글을 쓴다. 맛집의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일터의 애환이 엉켜 있는 지극히 사적인 나의 일상을 담담히 적어 내려간다. 먼 훗날 누군가의 가슴을 조용히 울릴, 나만의 ‘황토너’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