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행복했을까?-
내가 살던 멜번의 클레이튼 지역에는 공원이 많았다. 공원은 가난한 유학생에게 특히나 좋은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돈을 아껴야하는 때는 친구를 만나 놀러가는 대신 혼자 집 앞의 작은 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바카라도 읽고 음악도 듣고 샌드위치도 먹으면서 오후시간을 보냈다.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있어서, 한가한 주말이면 친구들과 소시지나 고기를 구워먹으며 맥주를 마시고 놀기도 했다. 공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을 때는 그곳을 지키는 수많은 나무들을 그다지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음이 몹시 지쳐있던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공원을 찾았을 때 나는 그 나무 중 한아름에 안을 수 있는 나무 하나를 발견하고는 한참을 안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주변의 고요함과 더불어 나무의 느린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힘들었던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 후 나는 종종 무언의 위로가 필요할 때나, 마음을 거리낌 없이 조잘대고 싶어질 때마다 그 나무를 찾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자신만의 나무가 생기면 이름을 붙여준다고 하던데 나는 오래 머물 사람이 아니라 금방 이별해야할 나무에게 차마 이름을 붙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 나무를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따듯한 온기를 느끼고 비밀을 나누며 내밀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혼 후 처음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들린 사려니숲 길에서 숲을 가득 매운 나무들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랐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한 나무 곁에 서서 가만히 팔을 감싸 안았다. 딸도 나를 따라서 한아름에 안을 수 있는 나무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딸과 나는 떨어져서 각자의 나무를 찾아 조용히 안아보았다. 그런데 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쪼르르 나에게 달려와 안기기 시작했다. 그런 딸에게 “ 넌 나무 안아보니까 어땠어? 좋지 않았어?” 라고 물으니 “모르겠던데? 나무보다 엄마 안고 있는 게 제일 좋아~” 라고 대답했다. 그런 딸을 가만히 안아주면서 나도 이제 더 이상 나무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한 날은 없겠구나 하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딸이 필요할 때마다 내가 나무처럼 버티고 서서 안기고 싶을 때마다 찾아와 안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겠지만 나도 딸을 처음 가졌을 때 딸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뱃속에 아이가 생긴 것을 알고부터는 좋아하던 커피도 자제하고 좋은 음식만 먹고 지루해서 잘 듣지 않던 클레식 음악도 찾아듣고, 예쁜 그림이 그려진 동화바카라도 보고 냉장고에는 그당시 내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김희애 사진도 붙여놓고 보았다. 그리고 태동이 느껴질 때마다 뱃속의 아이에게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얼른 보고 싶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뱃속의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들을 충분히 해 주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 했고 감사해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종종 나는 죄바카라감에 시달렸다. 신생아 때는 아이가 우는 데도 왜 우는 지 잘 모르겠고, 밤새 열이 나서 아파해도 해열제를 먹이고 열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가 처음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 했을 때는, 그 작은 팔에 링거 바늘을 꽂고 잠든 아이 곁을 지키면서 제발 아이 대신 제가 아프게 해주세요 라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도 했었다. 그렇게 자라고 유치원에 보낼 때 내 팔을 잡고 울면서 안 들어갈려는 아이를 억지로 들여보내 놓고는 유치원 앞을 서성이며 아직 집에서 더 데리고 있을까 수백 번 고민했다. 게다가 아이 발달에 맞게 해줘야 할 것들은 왜 그렇게 많은 건지, 그 많은걸 다 해주고 싶지만 해줄 수 없는 게 너무 미안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일하기 시작하고부터는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미안해서 조금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눈치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자 하고 결근에 조퇴를 당연하다는 듯 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되서 이혼한 나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조바심이 더욱 커졌다. 해주고 싶고 해줘야 할 것들은 더 많이 생겼는데, 오히려 아빠의 빈자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은 혹시나 나 때문에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아이가 학교 가 있는 시간동안에만 일을 했고 그 시간을 재외한 모든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냈다. 그래서 이혼 전에 토요일 하루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하던 대학원 공부는 이혼 후 아까운 등록금만 날리고 그만두었고, 나를 위해 쓰는 돈을 줄여 아이가 원하는 것을 사주었고, 상담치료를 받으 다니고 여행을 다녔다. 아이가 어느정도 큰 지금도 여전히 아이의 24시간 대기조로, 눈뜨면 아이의 아침을 챙겨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이 옆에서 잠드는 것을 지켜보다가 잠들 때 까지 나의 눈과 귀와 마음의 레이더는 아이만을 향해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불안했고 피곤했고 무기력했다. 아이를 사랑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지만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만으로는 나의 행복이 채워지지 않았다.
‘아낌없는 주는 나무’라는 바카라을 처음 읽었을 때는 속으로 ‘나무야 너는 참 바보 같다. 뭘 그렇게 주기만 하니’라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엄마가 되고나서 나무가 왜 그렇게 아낌없이 줄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무는 자신을 찾아온 어린 소년을 사랑했다. 그래서 소년이 친구가 필요할 때 놀이터가 되어주고, 돈이 필요할 때 사과를, 집이 필요할 때 가지를, 배가 필요할 때 나무기둥을 내어주었다. 소년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밑동만 남은 나무는 그래도 소년이 다시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다 늙은 소년이 자신을 다시 찾아왔을 때 소년이 쉴 수 있는 그루터기가 되어 줄 수 있음에 감사해한다. 나는 나무의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아이를 낳기 전에 몰랐다. 사랑도 주는 만큼 받는 것이고 받은 만큼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사랑이 엄마가 자식에게 주는 무조건 적인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을 엄마가 되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이만큼 자라게 했다는 것도 엄마가 되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늙은 소년은 얄밉고 밑동만 남은 나무가 안쓰럽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외에도 부모의 숭고한 사랑에 대해 가르쳐 주는 이야기는 많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하는 것은 아름답고 가치 있고 무엇보다 당연히 그래야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종교였고 절대 진리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처음 읽을 때부터 지금 다시 읽을 때까지 나는 이 진리를 나의 부모로부터 그리고 부모가 된 나의 친구들로부터 끊임없이 학습화 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성현들의 말씀은 왜 그리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인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숭고한 희생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욱이 오롯이 혼자 아이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주는 일은 내가 비구니나 수녀가 되기 위한 수양을 해야 가능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성인하고는 거리가 먼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혼하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이유 없이 눈물이 나고 양육권을 나한테 넘기고 혼자 살고 있는 전남편이 부럽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면서 나는 이 당연하다 여긴 희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부족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자바카라도 했다. 그러다 결국 나는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한 사람으로써 욕구와 욕망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데 늦게까지 자지 않는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얼른 자란 말이야!” 라고 화를 내고나서, 내 욕구가 끊임없이 좌절될 때 절대로 아이에게 올바른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외식을 할 때도 푸드 코트를 간다. 거기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어서 아이가 먹고 싶은 것도 내가 먹고 싶은 것도 선택해서 함께 먹을 수 있다. 여행을 가서도 아이가 좋아하는 곳에 한번 가고나면 내가 좋아하는 곳에도 아이를 데리고 간다. 그렇게 딸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배려해 줄 수 있도록 가르친다. 처음에는 이제껏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맞춰주던 엄마가 안 그러니 "엄마 미워 !"하면서 때를 쓰기도 했지만、 몇 번 시도하다 보니 이제는 당연히 엄마가 원하는 것도 같이 해줘야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듯하다. 그래서 딸아이와의 외출이 예전에는 딸을 위해 놀아주러 다닌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함께 논다는 기분이 들어서 더욱 즐겁다. 인간의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이고 그것은 부모자식간의 관계에 평화를 유지하는데도 적용되는 원칙이라는 것을, 사랑의 동의어가 꼭 희생은 아님을 희생의 번 아웃을 겪으면서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