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로 세상 전복한 여성 화학자의 뚝심

[서평] '보니 가머스'의 <레슨 인 케미스트리(화학 수업) 1.2권>

by오순미

2026년 한국에 사는 독자가 19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고 처음 접한 소설임에도 기시감을 느꼈다면 왜일까? 반세기를 훌쩍 넘겼는데 소설 속 이야기가 낯설지 않아서다. 온라인 게임이 여성에게 '순응하며 뒤치다꺼리나 하라'고 명령한 시대를 그린 드라마 <언더커버 미쓰홍>과도 닮았다.


시공이 다른 데도 '지금 여기'를 써 내려간 느낌이 빽빽하게 들어찬 소설 <레슨 인 케미스트리(화학 수업) 1.2권>. 나아가려 해도 길조차 터주지 않는 관행. 능력보다 태도로 먼저 평가하려는 문화.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 같은 것들이 여성에겐 철저하게 적용됐다. 관습이란 건 생각보다 천천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웠다.


첫 아이 낳고 육아 휴직 후 출근한 지 몇 달 만에 둘째 가진 걸 알게 된 지인은 2014년 당시 결국 퇴사를 택했다. 곧 다시 내야 할 육아 휴직이 부담스러웠던 데다 첫 아이의 돌발 상황으로 조기 퇴근을 몇 번 하다 보니 동료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아서다. 신경을 쓰느라 종종 배가 뭉쳤던 그녀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당시를 회상하며 아쉬워했다. 상황은 다르지만 소설 속 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가 겪은 슬롯적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학으로 바꾼 세상


'보니 가머스'의 소설은 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가 수석 화학자로 복귀해 자기 삶을 완성하는 이야기다. 여성이란 이유로 성추행, 대학원 탈락, 연구 결과 강탈 등 우여곡절을 겪지만 슬롯적 차별에 굴하지 않았던 그녀의 근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쟁취란 단어가 유일할 만큼 치열했던 그녀의 삶에서 출중한 능력으로도 부수기 어려웠던 장벽은 관성처럼 작동하는 고정관념이었다.



▲'보니 가머스'의 소설 <레슨 인 케미스트리(화학 수업)> 표지. 다산바카라방


의심하거나 점검하지 않은 채 자동으로 반복되는 사고방식은 변화를 이끌어야 할 방송국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생계를 위해 'TV 요리쇼'를 진행하게 된 조트에게 방송국은 '남편들을 위한 예쁜 요정'이 되기를 원했다. 이를 거부한 채 순수 화학으로 접근한 그녀의 요리 방송은 미국 전역을 뒤흔들며 세상 편견을 전복시켰다. 전투적인 뚝심이 얻어낸 쾌거에 전율하며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다.


"저는 <6시 저녁 식사>를 통해서 화학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여자들이 화학을 이해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할 테니까요." (2권 191쪽)


조트는 화학을 접목한 요리 방송으로 세상은 고정불변이 아니란 걸 당시 여성들에게 알렸다. 화학의 핵심이 변화인 것처럼 불합리한 억압과 관습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이성을 가지도록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트의 생각만큼 변하지 않은 모습이다.



통쾌와 미안이 교차한 이유


뺏기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선 조트는 화학자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바카라을 덮은 후엔 통쾌함과 동시에 미안함이 따랐다. 조트가 맞닥뜨린 장벽의 일부가 어쩌면 내 안에도 있을지 모른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1980년대 말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온라인 게임생활이 의외로 무난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업무 외적인 노동에 노출되지도 않았고 '미스'라 부르는 호칭보다 이름을 불러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부서장의 눈치를 살피며 칼퇴근을 반납하는 일도 없었고 업무 회의도 동등한 입장에서 참여했다. 그렇다고 회사 전체가 똑같은 사정은 아니었다. 내가 속한 부서만의 독특한 분위기였던 게 분명하다. 그것은 관습의 문제를 이해한 부서장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환경이라 말할 수 있다. 부서장은 스스로 커피를 해결하는 솔선수범을 보인 데다 모든 직원을 이름으로 불렀다. 시대적 관습을 깬 한 사람의 시작은 40여 명에 가까운 부서원에게 암묵적인 동의를 이끌어냈다.


차별의 중심에 서보지 못해 문제를 문제로 의식할 만한 동질감이 약했던 난 조트의 저항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실패했다. 조트의 가치관엔 공감하지만 갈등 회피 성향이기에 그녀처럼 행동파는 되지 못했을 것 같다. 커피든 호칭이든 어쩌면 시대적인 분위기에 묻어갔을지 모른다는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속내가 털린 듯해 면구스러웠다.


능력을 증명하고 또 증명하는데도 견고한 장벽이 더 선명해질 때는 피로감도 따랐다. '조트처럼 유능한 천재 화학자조차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나같은 평범한 여성의 삶은 어땠을까? 이 정도로 독하고 완벽해야만 제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건가?'란 무기력한 마음도 들었다.


그럼에도 이 바카라을 놓을 수 없었던 건 해방감 때문이었다.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꼿꼿하게 밀고 나간 조트의 실행력은 보기 드문 자극이어서 부담이 해소된 듯 후련했다. <화학 수업>은 조트의 저항에 동참한 듯 대리만족을 느끼게 했다.


세상 관습은 의심할수록 바뀌고 바뀐 관습은 삶의 방식에 변화를 가져오는 건 분명하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라고 낙담하지 않는 한 삶을 변화시킬 우리 안의 원소는 특별한 화학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60년 전 조트의 화학 수업이 불투명한 지배 논리와 모순을 분해해 새로운 세상과 결합할 수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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