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말 - 21
동학하는 사람들은 심고를 한다.
심고(心告)는, "마음으로 고한다"는 말이고, "마음에 고한다"는 말이다.
이때 마음(心)은 곧 한울님(天主)이다(心卽天, 海月). 그러므로 심고는, 이심고심(以心告心)이고 이천고천(以天告天)*이다.
[본래 동학경전에는'이심치심(以心治心)'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말만 나온다. 또 심고의 처음 표현은 '고천(告天)'이었다. '이심고심' '이천고천'은 이런 말을 참조하고, 심고의 의미를 생각해서 필자가 지은 말이다.]
고한다는 건, ‘알린다’는 뜻이고, ‘보고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알리고, 보고하나? 내가 하는 일거수일투족, 내가 먹는 생각 하나하나를 한울님에게 모두 알리고 보고한다. 그게 가능한가? 마음으로 하는 일이니, 해 보면 가능하다는 걸 안다. 마음은 ‘생각’을 포함하여, 이 우주에서 빛의 속도보다 빠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 안 될 것이 없다.
[빛보다 빠른 것이 '유이'할 수도 있다. '양자얽힘' 현상이 그것이다. 이것은 유이한 것일 수도 있고, 유일한 것의 두 양상일 수도 있다. 빅뱅은 '시간+공간'의 생성 사건이다.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것의 두 양상이다. 마찬가지로 마음과 양자얽힘은 동일한 사건의 두 양상이다. 이신전심은 그 세속적 양상이다.]
왜 그래야 하나? 그게 ‘도리’(道理)라서 그렇다.
어린아이가 집 밖에 나가 놀고 싶을 때, “엄마, 나 나가서 놀아도 돼?”라고 물어보고, “그래 1시간만 놀다 오렴!”이라는 엄마의 대답(허락)을 받는다. 친구들과 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 나 (놀고) 왔어요!”라고 말한다. 심고는 그런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아침에 “오늘도 열심히!”라고 말하고 서로의 온라인 게임으로 향하거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여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격려하며 마주하는 일도, 심고의 연장선상이다. (혹은 ‘다녀올게!’하고 출근하고, 퇴근하여 ‘다녀왔어!’라고 하는 것도)
사람이 곧 한울님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심고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사람과 만물 사이에, 심고가 오가야 한다. 밥을 먹을 때 하는 심고가 ‘식고(食告)’이다. 마찬가지로 ‘일어날 때 심고’ ‘잘 때 심고’ ‘올 때 심고’ ‘갈 때 심고’ ‘꽃을 만질 때 심고’ ‘하늘을 볼 때 심고’가 모두 필요하다.
그걸 간과해서, 세상이 각박해지고, 지구가 위험에 처해졌다.
-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동학(東學)이다.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는 일에도 심고가 필요하다. 아니, 사실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이 심고 그 자체이다. '호흡법' '호흡수련'이 특화되어 있기도 하지만, 사실은 '호와 흡' 그것이 '전체(우주, 한울님)'와 소통하는 과정인 만큼, 그것을 '의식화(마음, 생각)'한 것이 심고인 셈이다.
'무미건조'하게 '호흡'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성함'을 느끼고, 보답하는 것이 심고다.
그래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상, 마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심고하는 일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 내가 말하고 행동(하려고)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양심(良心)'에 거리낌이 없는지, 견주어 보는 일이다. 양심이 곧 천심이다. 천심에 비추어 보는 일이다.
심고는 안으로 한울님께 하는 말이라면 (내유신령 內有神靈)
말은 밖으로 심고하는 일이다. (외유기화 外有氣化)
누구나 이것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각지불이 各知不移) (수운, 동경대전, 논학문)
내유신령 - 외유기화 - 각지불이하는 것이 곧 '모시는 것' 즉 시(侍)이다.
모시는 일, 잘 하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