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사소한 것을 들여다보는 일

김초엽의 <비구름을 따라서>

by새싹바카라방

재작년 가을, 수령 사백 년 된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 전주 향교에 들렀던 적이 있다. 무수한 노랑의 잎들, 웅장한 나무의 높이며 둘레가 우선 놀라웠다. 나무에 손을 얹어보기도 했다. 어떤 경이로움, 경건한 마음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나무의 압도적인 크기나 풍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무가 살아온, 사백 년이 넘는 아득한 세월에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아득한 시간이나 웅장한 자연경관, 위대한 문화유산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을 경외심이라고 한다. 인류가 간직한 어떤 보편적인 정서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지난 4월, 서울의 어느 미술관 관계자들이 수령 이백 년이 넘는 은행나무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제초제를 주입했다. 논란이 되자 해당 미술관은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시하고 해명했다. 안전사고 및 통행에 불편이 따른다는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려 한 것이며, 나무의 처리를 논하는 과정에서 소유주들의 의견이 만장일치에 이르지 못해 상황 개선이 어려웠다는 이유였다.


간혹 고찰이 화재로 소실되었다거나, 고령의 나무가 병으로 고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가 있다. 예기치 못한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럴 때면 경외심을 느꼈던 마음만큼 안타까운 탄식이 나온다.

그런데 나무를 독살하려 한 행위는 그런 상황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나. 눈엣가시가 된 대상을 죽여서 처치하겠다는 의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 잔인함에 탄식보다는 분노가 일었다.


김초엽의 SF 단편소설 <비구름을 따라서>에는 작고 사소한,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들을 모으는 인물 ‘이연’이 등장한다. ‘보민’은 그녀와 보드게임 모임에서 첫 만남을 갖는다. 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상상하고 설명하는 ‘노바 파우치’라는 게임을 계기로 친분을 쌓는다. 특히 이연은 뽑은 물건들이 이상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그 쓰임을 설명한다.

‘비가 오는 날만 켜지는 라디오.’ 그건 노바 파우치의 주머니에서 뽑은 조합이었다. 그 토큰들을 뽑고 나서 이연은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
- 그곳 사람들은 열두 살이 되면 ‘녹색’이 될지를 결정해야 해. 녹색은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지. 광합성을 할 수 있게 엽록소를 피부에 심거든. ••• 녹색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꼭 숲처럼 보일 거야. 녹색들은 햇볕을 따라 이동하지. 그리고 비 오는 날에는, 비가 오는 날만 켜지는 라디오를 들으며 낮잠을 자겠지.

둘은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걸 확인한 뒤 룸메이트가 된다.

하지만 이내 보민은 쓰레기로 가득 한 이연의 방을 보게 된다. 의미 모를 장식품, 짝을 잃은 양말, 나뭇가지, 돌멩이 등. 이쪽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소한 무언가가 자꾸만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고 또 넘어온다면서 방을 그것들로 가득 채운 것이었다.

한편 이연은 한 온라인 게임에 정착하지 못하고 '힘들어서, 지루해서, 질려서' 등 철없는 이유를 대며 이직하기도 한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수집한 것들처럼 살아가는 인물.

어느 날 이연은 또 보민에게 작고 이상한 물건을 주워 와서 보여준다.

햇볕 아래 오랜 시간 놔두면 초록색 웃는 얼굴이 뜨고, 그늘에 놔두면 빨간색 화난 얼굴이 뜨는 반투명한 배지. ••• 그런데 보민이 이연의 말들을 흘려듣는 동안 이연의 세계는 점점 구체화되었고 긴 이야기가 되어갔다.
- 그러니까, 사실은 평화롭고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던 거야. ••• 이 배지도 녹색들이 제대로 일하는지, 쓸모를 증명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감시 배지였겠지. •••
- 만약 이연 네가 그 세계로 가면, 녹색이 될 거야?
이연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꾸했다. •••
- 녹색이 될래.
- 왜, 광합성을 하려고?
- 비구름이 다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할 거야. 그래서 온종일 비 오는 곳만 졸졸 따라다닐 거야. 광합성은 안 할 거야. 내가 숨 붙어 있을 만큼만 몰래 할 거야. 비가 아주 잠깐 갤 때만.
- 진짜 어이없네. 왜 굳이 그러는데?
- 음 그건, 아마도...
이연이 진지한 표정을 하더니 곧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 쓸모를 증명하라고 말하는 세계에 저항하려고.


‘핵심 질문(Essential Question)’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하나의 답을 찾아내는 질문이 아니라, 사고를 활성화시키고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거듭하게 만드는 질문. 정당한 근거와 지지를 받는 질문이어야 한다는 특징도 있다.

"어려움에 처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핵심 질문에 해당한다.

<비구름을 따라서>의 ‘이연’이라면 이런 질문들을 간직했을 것 같다.

”세상은 왜 쓸모를 강요하는 걸까?“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있을까?“

“쓸모란 무엇일까?“

어떤 물음은 평생에 걸쳐서 그 답을 탐구하게 만든다. 그렇게 답을 찾으면서 사고가 넓어지고 삶과 정신이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수령 이백 년이 넘든 말든 딱히 쓸 데도 없고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한 나무쯤 제초제를 주입해서 없애면 되겠다는 그 사고방식과 행동. ‘이연’이 간직했을 법한 물음을 품고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경외심이나 생명 존중과 같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간직하고 있을 마음을 고려한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짓이다.

반려식물, 누군가는 반려돌까지 돌보는 시대이다. ‘반려’라는 단어가 결합한 대상이 생명체든 아니든 간에 정서적으로 교감하거나 의지하는 대상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생명체를 대하는 어떤 감수성이 높아진 시대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런 감수성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한 시대가 공유하고 있거나 바람직하게 여기는 어떤 마음이 있다면, 존중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해당 미술관은 故 김환기 화백의 예술 세계를 정리, 소개하고자 설립되었다고 한다. 화백의 호가 ‘나무와 이야기한다’는 뜻의 ‘樹話(수화)’라고 하니, 생전 나무를 아끼셨으리라 짐작된다.

나는 미술 작품을 볼 줄도 모르고 김환기 화백의 작품 세계를 미술관의 관계자들처럼 이해하고 있지도 않다. 다만 미술관 측이 은행나무를 독살하려고 한 행위는 생전 화백의 가치관과 비교했을 때 낯 뜨거울 정도로 모순적이라는 것만큼은 알겠다.

그 모순된 의사결정으로 상처를 입은 것은 나무뿐만이 아닐 것이다. 김환기 화백이 추구했던 가치나 그가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아름다움에도, 경외심이라든가 생태 감수성과 같이 많은 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마음에도 상처를 남겼다.


<비구름을 따라서>의 '이연'은 분명 특이한 시선을 가졌다. 작고 사소한 것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에게 관심을 쏟는다. 굳이 '그럴싸한 이야기를 부여'하면서 쓸모의 외연을 확장한다. 소외된 무언가에게 쏟는 관심과 그것의 쓸모며 존재의 이유를 어떻게든 발견하려는 인물의 시선이 아름다웠다.

말 못 하는 생명체의 고통에 공명하고 시대착오적인 만행을 고발하는 이연들이 우리 슬롯 곳곳에 존재하는 것 같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부암동 은행나무가 다시 건강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