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을 벗길 바라여
백의성 고혈압은 결국 나에게 이런 걸 가르쳐줬다. 내 몸은 정직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 과잉 반응할 뿐이고, 그 과잉 반응에는 다 이유가 있다. 오랜 시간 쌓여온 경험, 학습된 반응,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몸에 새겨진 패턴까지 —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민감함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민감함을 미워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시스템의 흔적이다.
일상의 불안도 다르지 않다. 없애야 할 결함이 아니라, 오래 길들여진 경보 시스템의 습관이다. 그 습관은 천천히, 반복적으로, 다정하게 재훈련할 수 있다. 숨을 고르고, 이름을 붙이고, 기록하고, 작은 노출을 반복하면서. 이 열 편의 글에서 다뤘던 것들 — 신호로 읽기, 상황을 구분 못하는 몸의 습성, 측정 장소를 바꿔 넓게 보기, 이름 붙이기, 호흡 먼저 해석은 나중, 평가받는다는 감각의 정체 살피기, 반복 노출로 무뎌지기, 거짓 경보 가려내기, 기록으로 닻 내리기 —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내 몸과 싸우지 않고, 내 몸의 언어를 배워가는 것.
흰 가운을 벗은 자리에서 혈압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듯, 불안도 결국은 지나가는 상태라는 걸 몸으로 배웠다. 오늘 하루가 조금 흔들려도 괜찮다. 그것은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그저 내 몸이 아직도 열심히, 어쩌면 조금 과하게, 나를 지키려 애쓰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뜰 때 조금은 덜 무겁게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글은 의학적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백의성 고혈압이나 만성적인 불안이 지속된다면 의사나 정신건강 전문가와 상담하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