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화된 핵개인 시대, 잠언이 던지는 이웃이라는 질문

byLogos Brunch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촘촘하게 연결된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가장 깊이 고립된 핵개인(atomic individual)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파편화된 고독의 한복판에서 3,000년 전 쓰여진 잠언은 현대인들에게 놀랄만큼 충격적인 생활 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혈연 관계마저 의미를 점점 상실해 가는 비정한 도시에서, 타인과 어떻게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실제적인 대안이 바로 이 오래된 지혜 속에 담겨 있습니다.

269612_184803_4421.jpg

구약의 두 세계, 그리고 오늘 우리의 자리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전혀 다른 두 슬롯를 마주하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모세오경, 그리고 여호수아에서 에스더에 이르는 역사서들은 하나의 공통된 세계관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벧 아봇(bêt 'ābôt), 곧 부계 씨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조직된 세계입니다. 계보가 정체성이고, 지파가 안전 보험이며, 혈연이 곧 도덕의 기초였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친족이 나서고, 위협이 오면 씨족이 방패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홀로 서지 않았습니다—아니, 홀로 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언이 전제하는 세계관은 전혀 다릅니다. 잠언은 지파의 울타리를 벗어나 각자도생의 치열한 삶이 펼쳐지는 도시와 개별 가정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사람들은 도시에 살고, 자기 가정을 꾸리며, 시장과 골목과 일터에서 이름 모를 타인들과 부딪히며 살아갑니다. 잠언이 관심을 기울이는 슬롯적 단위는 확대 가족이 아니라 가정과 도시이고 이름모를 타자들입니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잠 11:10)라는 말씀이 상징하듯, 잠언은 도시적 삶과 그 공동체의 도덕적 건강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혈연보다 지리가, 지파보다 이웃이 훨씬 더 중요한 세계입니다.


이 풍경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슬롯학자들은 우리 시대를 '핵개인(atomic individual)' 시대라 부릅니다. 핵가족조차 해체되고, 1인 가구가 보편적인 가구 형태가 된 슬롯. 취업과 주거를 위해 태어난 공동체를 떠나 낯선 도시로 이주하는 삶. 부모도 형제도 고향도 멀리 떠나 살아가는 우리는 혈연의 보호망 없이 각자도생하고 있습니다.


잠언은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위하여 쓴 바카라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이 이웃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3,000년을 건너 지금 우리에게도 직접 말을 걸어옵니다.


사적 취향의 친구에서 지리적 연대의 이웃으로

잠언을 읽다 보면 반복되어 등장하는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레아(rēaʿ)인데, 영어 성경의 상당수는 이 단어를 'friend(친구)'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 번역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문에서 사용된 단어가 바로 레아(rēaʿ), 곧 '이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친구'로 옮기는 순간, 잠언이 폭로하는 현실의 서늘함이 희석됩니다.


'친구'는 내가 선택한 사람입니다. 나와 취향이 맞고, 가치관이 비슷하고, 함께 있으면 편한 사람입니다.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는 내가 골라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아(rēaʿ)가 가리키는 '이웃'은 다릅니다. 이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지리가 만들어주고, 일터가 연결해주고, 우연히 내 삶의 곁으로 다가온 익명의 타자들입니다. 그들은 내 취향과 무관하게 내 삶 안으로 들어옵니다.


클레멘츠(Ronald E. Clements)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잠언의 지혜자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단순히 우정이 아니었습니다.1) 그들은 '이웃들이 친구가 되는' 강한 공동체 정신과 행동 규범을 세우려 했습니다. 단순하게 친구로 번역한 것 하나 때문에 이 거대한 도덕적 비전을 '친구 사귀는 법'이라는 사소한 처세술로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Logos Brun···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 "성경 속 왕조실록" “성경 속 노마드” "사랑의 9가지 습관(공저)"의 저자. http://youtube.com/c/LogosLibrary

4,77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도르테 죌레의 생애와 신학이 한국 교회에 전하는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