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 신도시 재정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일산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재건축 연한이 도래한 아파트 단지들, 공실로 비어 가는 상가들, 줄어드는 인구. 숫자로만 보면 일산은 쇠퇴하는 신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숫자 너머를 봐야 한다. 한국의 신도시 중 이만큼 직주락 근접형 동네가 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 또 있는가.
분당의 단독주택 면적 비율이 6.6%에 그친 반면, 일산은 26.2%였다. 1기 신도시 중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다. 용적률 168%는 분당(180%), 산본(190%), 평촌(180~220%)보다 낮다. 더 낮은 밀도, 더 넓은 저층 주거지. 이 설계상의 선택이 30년 후 밤가시마을이라는 경기 북부 대표 골목상권을 만들어냈다. 일하고 살고 즐기는 것이 걸어서 닿는 거리에 모여 있는 동네. 그것이 한국 신도시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고, 일산은 1기 신도시 중 그 가능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도시다.
재정비는 불가피하다. 노후 단지는 정비돼야 하고, 공실 상권은 활로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재정비가 일산의 가장 큰 자산—저층 주거지가 만든 골목 구조와 동서 녹지축이 빚어낸 보행 환경—을 지워버린다면, 일산은 다른 1기 신도시와 구별되는 무언가를 잃는다. 재정비를 앞두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을 유지해야 하는가.
일산신도시는 1989년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의 일환으로 분당과 함께 조성되었다. 고양시 일산 일대 460만 평에 인구 27만 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된 대규모 계획도시다. 분당이 첨단도시를 표방했다면 일산은 처음부터 전원도시를 지향했다. 단독주택 필지에 다세대를 수용하되 높이와 세대수를 제한했고, 골목길 불법주차를 최소화하는 제도를 함께 도입했다. 그 결과 일산에는 신도시 안에서도 사람이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골목의 결이 살아남았다. 이 세부 규정들이 오늘날 성저마을, 밤가시마을의 저층 골목 구조를 만든 원형이다.
일산의 공간 구조를 이해하려면 두 개의 동서 녹지축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경의선 일산역에서 후동공원·문화공원을 거쳐 3호선 주엽역으로, 다시 주엽공원을 지나 호수공원까지 이어지는 주엽공원로 축이다. 다른 하나는 경의선 백마역에서 마두공원·강촌공원을 거쳐 3호선 마두역으로, 낙민공원을 지나 호수공원까지 연결되는 마두공원로 축이다.
두 동서 녹지축은 공원과 공원 사이를 계단 없이 완만한 경사로만으로 도로를 넘는 경사로형 보행교로 연결하고, 중앙로 같은 대로는 지하보도로 통과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집에서 공원으로, 공원에서 상점으로, 상점에서 다시 집으로 걸어서 이동하는 일상이 이 축 위에서 이루어진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는 왜 이렇게 보행교가 많지?' 하고 놀랄 만큼, 일산은 보행을 기본값으로 설계된 도시다.
남북 방향으로는 이야기가 다르다. 경의선역과 3호선역을 잇는 두 동서 녹지축은 호수공원에서 만나지만, 밤가시마을에서 성저마을로, 정발산 상권에서 주엽역 상권으로 이어지는 남북 보행 연결은 취약하다. 중심부의 남북축은 중앙로라는 대로일 뿐이다. 서로 다른 동네들이 보행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 이것이 일산 도시설계의 완성되지 못한 부분이다.
나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주엽동 문촌마을에 살았다. 주엽역을 기준으로 한 생활권이 완결적이었다. 주엽역 앞 그랜드백화점, 공원길, 문촌마을, 후곡마을을 거쳐 일산역까지 이어지는 동선이 자연스러운 일상의 루트였다.
그때 일산은 서울 어느 동네보다 쾌적했다. 넓은 도로, 정돈된 보도, 호수공원의 산바카라로. 아파트에서 공원까지, 공원에서 상가까지 걸어서 닿는 거리였다. 분당이 자동차 중심 도시로 설계된 반면, 일산은 걷는 도시를 지향했다. 쾌적한 주거와 가까운 상권, 녹지 보행로로 이어진 공원. 당시 일산이 구현하려 했던 것은 지금 언어로 말하자면 생활 인프라가 걸어서 닿는 거리 안에 모인 삶의 방식이었다.
그 시절 일상의 중심이었던 그랜드백화점이 2025년 2월 문을 닫았다. 1996년 일산의 1호 백화점으로 개관해 30년 가까이 주엽역 상권의 얼굴이었던 곳이다. 백화점 하나의 폐점이 아니라 주엽역 생활 상권 전체의 쇠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한때 주엽역과 마두역이 각각 일산 북부와 남부 주민의 일상 상권이었으나, 라페스타와 웨스턴돔이 들어선 후 중심상권이 정발산역 쪽으로 이동하면서 두 역세권 모두 목적지 없이 오가는 통과 지점으로 바뀌었다.
일산 주민들이 '시내 간다'라고 하면 정발산역 일대를 뜻한다. 라페스타, 웨스턴돔, 롯데백화점, MBC드림센터가 밀집한 이 지역이 일산신도시 최대 상권이다. 그러나 이 상권은 처음부터 주민의 일상을 담는 공간이라기보다 외부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목적지형 상권으로 설계됐다. 그것이 지금의 취약함으로 돌아오고 있다.
라페스타는 2003년 개장 당시 국내 최초 스트리트형 쇼핑몰이었다. 길이 300m, 최대폭 28m의 보행자 전용도로 양쪽에 상점들이 마주 보는 이 형식은 당시 경기 북부 어디서도 볼 수 없던 것이었다. 한때 권리금이 1억5000만~2억 원에 달했다. 지금은 1층 점포 세 곳 중 한 곳이 비어 있고, 권리금 없는 매물이 대부분이다. 인근에 스타필드, 이케아 등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수요가 분산됐고,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는 실외형 상가라는 구조적 한계도 드러났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인구구조다. 1991년 첫 입주 당시 구매력 강한 40대가 30여 년이 지나 70~80대가 됐고, 자녀들은 파주 운정 등 인근 신도시로 이주했다. 세대교체에 실패한 신도시 상권의 필연적 귀결이다.
라페스타 바로 곁의 웨스턴돔도 마찬가지 처지다. 라페스타의 대체재로 2007년 들어섰지만 지금은 함께 침체를 겪고 있다. 두 곳이 모두 어렵다는 것은 개별 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이 상권 모델 자체의 한계를 보여준다.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는 목적지형 상권은 더 크고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는 순간 무너진다. 역설적으로, 침체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임대료가 반토막 나면서 소규모 독립 브랜드가 진입할 수 있는 조건이 생겼다. 정발산 상권이 먼 곳의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목적지에서 인근 주민이 매일 찾는 생활 상권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
정발산 상권이 쇠퇴하는 동안, 일산 서쪽 끝에서 새로운 상권이 성장하고 있다. 킨텍스(KINTEX) 주변 상권이다. 한국 최대 전시컨벤션 시설인 킨텍스를 중심으로 현대백화점 킨텍스점, 레이킨스몰, 원마운트, 그리고 2025년 6월 스타필드마켓 킨텍스점으로 리뉴얼한 대형 복합시설이 집적해 있다. GTX-A 킨텍스역 개통과 함께 접근성이 크게 개선됐고, K-POP 콘서트 등 킨텍스 행사와 연계한 외국인 방문객이 늘면서 이 상권은 일산을 넘어 광역 소비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킨텍스 상권이 일산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자동차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구조, 행사가 없는 평일의 공동화, 대형 유통시설 위주의 구성. 이 상권은 일산 주민이 매일 드나드는 생활의 장소가 아니라, 특정 목적을 위해 찾아가는 광역 목적지다. 킨텍스 상권의 성장이 주엽역 상권과 정발산 상권의 쇠퇴를 가속화했다는 역설이 여기 있다. 주민의 일상 소비가 아파트 단지 인근 골목이 아니라 자동차로만 닿는 대형 시설로 빠져나갈수록, 일산은 도시 전체가 목적지형 소비 공간으로 재편되고 동네 단위의 생활 거점은 점점 더 비어 간다.
밤가시마을은 이름부터 역사가 깊다. 고려 시대 기록에 율악부곡(栗岳部曲)으로 등장하는 이곳은 정발산 일대에서 밤을 특산물로 재배하던 마을이었다. 신도시 개발 당시 유일하게 보존된 전통가옥 밤가시초가가 아직 남아 있다. 정발산 북쪽 경사면에 5층 이하 저층 빌라와 단독주택, 상가주택이 뒤섞인 이 마을은, 아파트 위주의 신도시 한복판에서 다른 결을 가진 공간이었다.
이 마을이 경기 북부 대표 골목상권이 된 것은 계획의 결과가 아니었다. 첫 계기는 앤티크 상점들이었다. 밤가시마을 8·9단지 주택가 골목에 아기자기한 소품부터 고풍스러운 가구까지 다루는 앤티크 상점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보넷길이라는 이름의 거리가 형성됐다. 저렴한 임대료, 소규모 필지, 골목 스케일의 보행 환경. 신도시 계획 당시의 저밀도 설계가 이 조건들을 만들었다.
앤티크 거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분위기 좋은 카페와 음식점이 따라 들어왔고, 2018년 말부터 밤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SNS에서 급속히 확산됐다. 정발산동 비버리빌리지라 불리는 단독주택단지와 인접한 덕에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촬영지가 된 것도 이 일대 특유의 감성을 강화했다. 주민이 살고, 창업자가 일하고, 방문자가 즐기는 것이 한 골목 안에서 이루어지는 풍경. 밤가시마을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밤가시마을의 성공은 동시에 일산 재정비 논의의 가장 아픈 지점을 드러낸다. 이 마을 주민 상당수가 고층 재개발을 원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다. 그러나 고층 주상복합이 들어서는 순간 보넷길과 밤리단길은 사라진다. 골목의 결이 사라지면 저렴한 임대료도, 소규모 필지도, 걸어서 오가는 일상도 함께 사라진다. 서울에서 이미 수없이 반복된 이야기가 일산에서 다시 쓰이려 하고 있다.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역설적으로 가장 빠르게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장성마을과 함께 일산신도시 남서쪽 끝에 위치한 성저마을은 일산에서 가장 조용한 동네다. '성 아래 있는 마을', 혹은 '별 아랫마을'이라는 뜻의 이 마을에는 고구려 시대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저마을에 들어서면 일산의 다른 곳과는 다른 공기가 느껴진다. 유럽의 작은 소도시를 걷는 것 같은 감각이다. 대형 간판도, 프랜차이즈 일색의 상가도 없다. 프랑스어 이름의 카페, 소박한 공방, 작은 식당들이 저층 건물들 사이사이에 아기자기하게 들어서 있다. 사는 곳 가까이에 갈 만한 곳이 있다는 것, 이 단순한 사실이 성저마을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 마을에서 독립서점 오후서재를 운영하던 허지수 대표는 내가 아는 가장 진지한 신도시 키즈다. 8살부터 쭉 살아온 동네에 남아 서점을 열고, 성저마을 손그림 지도를 만들고, 신도시 세대의 감수성으로 마을을 기록했다. 그가 편집한 『일산 신도시 키드』는 신도시 키즈가 직접 쓴 최초의 단행본이었다. 매월 전시회와 독립출판 작가의 출판기념회, 크리에이터 모임 '월간 동료'를 열며 성저마을을 창작과 커뮤니티의 거점으로 만들려 했다. 오후서재는 이후 문을 닫았다.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떠난 동네에 홀로 남아 동네 바카라방을 지키던 그 시도의 기록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오후서재가 사라진 뒤에도 성저마을은 여전히 거기 있다. 이 마을의 저층 골목 구조와 유럽 소도시 감성은 오후서재 한 곳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도시 설계 당시부터 켜켜이 쌓인 공간의 결이다. 신도시 키즈가 자라서 자기 동네에 가게를 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곳. 그런 동네가 일산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재정비 논의 속에서 성저마을을 지켜야 할 이유다.
일산 재정비를 앞두고 확인된 선도지구는 백송마을 1·2·3·5단지, 후곡마을 3·4·10·15단지, 강촌마을 3·5·7·8단지 세 곳, 총 9174세대다. 밤가시마을과 성저마을, 정발산 단독주택단지는 아직 선도지구에 포함되지 않았다. 재건축이 불가피한 단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후화된 주거 환경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그러나 재정비가 아파트 용적률 높이기에 집중할수록, 일산이 30년에 걸쳐 조금씩 만들어온 것들—골목의 결, 보행 환경, 사는 곳 가까이에 있는 가게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무엇을 유지해야 할지 먼저 합의하지 않으면, 재정비는 일산을 다른 신도시와 똑같은 곳으로 만드는 작업이 될 뿐이다.
첫째, 두 동서 녹지축을 반드시 보전해야 한다. 주엽공원로 축과 마두공원로 축은 일산 주민이 차 없이 공원과 상권과 역을 오갈 수 있게 해주는 보행 생활의 뼈대다. 재정비 과정에서 이 축을 따라 형성된 공원·녹지 보행로를 단절하거나 축소하는 개발은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현재 취약한 남북 보행 연결을 강화해야 한다. 두 동서 녹지축의 중간중간을 남북으로 잇는 보행 네트워크를 구축해, 밤가시마을·성저마을·정발산 상권이 걸어서 연결되는 하나의 생활 생태계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밤가시마을, 정발산마을, 성저마을의 저층 골목 구조를 보전해야 한다. 이 마을들이 가진 저밀도·소규모 필지 구조는 한번 파괴되면 돌이킬 수 없다. 고층 재개발이 불가피한 구역이라면 최소한 저층부 상가 구조와 골목 스케일을 유지하는 설계를 의무화해야 한다. 창업자가 임대료 부담 없이 실험할 수 있고, 주민이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골목. 이것이 일산을 동네로 만드는 조건이고, 20년 후 또 다른 밤리단길이 생길 수 있는 토양이다.
셋째, 정발산 상권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 임대료가 낮아진 지금이 오히려 독립 브랜드가 진입할 수 있는 기회다. 라페스타와 웨스턴돔의 공실을 청년 창업 공간과 소규모 독립 브랜드로 채우는 정바카라이 필요하다. 광역 방문객을 겨냥한 목적지형 상권에서, 인근 주민이 매일 걸어오는 생활 상권으로. 그 전환이 일산 중심부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이다.
"신도시는 아낌없이 베풀었지만 우리는 계속 잃어버렸다." 독립영화 『신도시 키드』의 이 문장이 재정비를 앞둔 일산에서 계속 맴돈다. 일산이 30년 동안 쌓아온 것—두 개의 동서 녹지 보행축, 저층 주거지가 만든 골목 상권, 신도시 키즈들이 기록한 동네의 시간—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일산을 다른 신도시와 다르게 만드는 전부다. 무엇을 새롭게 만들 것인가 이전에, 무엇을 유지할 것인가. 그 대답이 일산의 미래를 결정한다.
참고문헌
고양시 (2024). 일산신도시 노후계획도시 정비기본계획안. 고양시.
고양신문 (2024.11.28). 일산신도시 4개 구역 9174세대, 재건축 2027년 착공 목표.
고양신문 (2025.02.20). 주엽역 그랜드백화점 29년 만에 폐점… 일산 서구 상권 재편되나.
국토교통부 (2015). 제1기 신도시 건설안내. 국토교통부 정바카라정보.
대한주택공사 (1997). 한국의 신도시계획과 개발개관. 대한주택공사.
허지수 편 (2023). 『일산 신도시 키드』. 오후서재.
한경카지노 게임 (2026.03.04). "역세권 대형 상가보다 생활권 소형 건물 투자가 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