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을 느끼는 순간은 다양하다.
기쁜 소식보다 슬픈 소식이 더 자주 들려오는 것.
혼자 먹는 끼니가 늘어나는 것.
홀로 있는 시간이 잦아지는 것.
그리고 점점 셋도 넷도 아닌, 둘이 남을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은퇴를 바라보는 때가 가까워지면서 남편은 부쩍 외로움을 느낀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왜 ‘내편’이 아니라 ‘남편’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본래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지만, 매번 ‘남편’이라고 부르다 보니 한창 살아내야 할 시간에는 서로를 남처럼 여기며 부대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남편이 요즘 점점 내편이 되어가고 있다.
문제는 내가 꼭 그래주기를 바라는 순간에만 내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학교에 강의를 나간다. 수업을 마치면 함께 수업한 강사들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신 뒤 돌아온다.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즐겁다. 스무 살의 나였다면 지금과 같은 푸근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이 듦과 삶의 경험이 주는 안온함과 여유에 감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통통 튀기도 하고 축축 가라앉기도 한다. 공허한 눈빛과 의욕 없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모습이 귀엽고 예쁘다.
어수룩하면서도 아닌 척하는 모습, 빤히 보이는데 저만 알고 있는 듯한 뻐김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어쩌면 손주 볼 나이가 다가와서 그런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을 만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열심을 낸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바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 좋아지는데, 남편은 나이가 들수록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해지는 모양이다.
“당신 수업 갈 때 내가 기사 해줄까?”
“왜? 굳이?”
“왔다 갔다 운전하는 거 힘들다며.”
“괜찮아. 그리고 네 시간이나 뭐 하면서 기다리려고?”
“그 동네에 뭐가 있나 돌아봐도 되고, 카페에서 기다려도 되지. 난 재미있을 것 같아.”
“아니? 당신은 그냥 당신 일을 해!”
“남편이 기사 해주면 좋아해야지, 왜 싫다고 해?”
뜬금없는 남편의 주문이다.
외롭다나.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올해 은퇴한 남편을 둔 다른 강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집 남편도 비슷하다고 했다. 은퇴를 앞두거나 은퇴한 남편들은 갑자기 주어진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어려워하는 모양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법만 익혔지, 일이 떠난 자리에 생긴 빈 시간을 채우는 법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되었다. 새벽밥을 지을 일이 없어 늑장을 부려도 좋은 여름날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주방에 나가보니 상부장에 떡하니 경고장이 붙어 있었다.
내가 하기 귀찮은 ‘일’은
다른 가족도 마찬가지겠지.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내’가 먼저 합시다.
아내를 위한 남편의 배려인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 하나둘 거실로 나온 아이들도 주방에 붙어 있는 경고장을 보며 한 마디씩 보탰다.
“이거 아빠도 이렇게 하겠다는 거겠지?”
“나는 내가 먹은 거 잘 치우고 있는데?”
남편의 배려가 싫지는 않았다. 덕분인지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방학, 개수대는 비교적 단정했다.
분리수거를 하려고 현관에 나갔더니, 어라? 경고장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핸드폰, 차키!!
쫌! 정신 차리라!
해골바가지까지 그려져 있는 걸 보니 단단히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가족들이 잠든 새벽에 출근하던 남편이 주차장까지 내려가서야 핸드폰과 차키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핸드폰이 없으니 누구에게 가져다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무더위에 다시 집까지 올라와 챙겨가려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종이 한 장에 적힌 문구만으로도 그날 아침 남편의 ‘빡침’이 고스란히 느껴져 웃음이 절로 났다.
가족에게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자고 적어놓고, 자신에게는 제발 정신 좀 차리라며 해골바가지를 그려놓은 남편.
나이 듦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혼자서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의 기사가 되어주고 싶어지는 것. 가족의 귀찮음을 먼저 헤아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핸드폰과 차키는 깜빡하는 것.
잊는 것은 조금씩 많아지고, 서로를 찾는 일은 잦아지는 것.
셋과 넷으로 북적이던 집에 언젠가 둘만 남게 되면, 남편은 지금보다 더 자주 내 곁을 서성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런 남편이 귀찮다며 밀어내면서도 그가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찾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남편은 점점 내편이 되어가고, 나도 조금씩 그의 편이 되어간다.
둘이 남을 날이 가까워진다는 것이 예전에는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서로의 깜빡함을 챙겨주고, 가끔은 기사도 되어주고, 문에 붙은 경고장을 보며 함께 웃을 수 있다면.
둘이 남는 일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