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와 전략을 장착한 현대적인 영웅
그리스 영웅, 오딧세우스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메티스(metis)이다. 메티스는 그리스어로 꾀, 기지, 바카라략을 뜻한다. 실천적 지혜이자 상황 판단 능력이다. 즉 힘이 아니라 상황을 읽고 살아남는 영리한 지혜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단순한 무력보다 위기 속에서 기민하게 판단하고 속이고 견디고 전략을 짜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오딧세우스이다.
메티스는 학문적 이론이나 추상적 사고를 통해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순간적인 판단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생존기술이자 실전 감각이다. 왜 그리스인은 메티스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고대 그리스 세계는 바다 항해, 전쟁, 무역, 정치 경쟁이 매우 많았다. 즉 예측 불가능한 세계였다. 그래서 힘센 사람 보다 상황에 적응하는 사람이 살아남았다. 메티스는 바로 그렇게 살아남는 사람의 능력이다.
오딧세우스는 전형적인 메티스의 영웅이다. 그는 아킬레우스처럼 압도적 무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헤라클레스처럼 괴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신 생각하고 속이고 참으며 계산한다.
키클롭스 탈출 에피소드를 보자.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에게 갇혔을 때 오딧세우스는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눈을 찔린 폴리페모스에게 다른 거인들이 "누가 널 공격했냐?" 고 묻자, 폴리페모스는 "아무도 아니다!"라고 외친다. 오딧세우스는 섬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즉 언어와 기지를 활용해 위험을 벗어나고 승리를 거두는 메티스의 대표 사례인 것이다.
또 세이렌 장면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세이렌의 노래는 듣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다. 이에 오딧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돛대에 묶는다. 유혹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지만 통제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다. 세이렌 장면은 인간 욕망의 통제 문제를 다룬다. 오딧세우스는 금욕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노래를 듣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신이 무너질 가능성을 알기에 스스로를 묶는다. 이것은 현대적으로 보면 “자기 통제 시스템”에 가깝다. 즉 메티스는 욕망을 제거하는 능력이 아니라 욕망을 관리하는 능력이다.
그런가 하면 고국 이타케에 돌아온 뒤에도 그는 곧장 영웅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거지로 변장해 적과 아군을 파악하고 상황을 분석한다. 즉 메티스는 단순한 꾀가 아니라 자기 감정을 억제하는 인내의 지혜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인은 메티스(metis)와 비아(bia)라는 두 능력을 서로 구분했다. 메티스는 지혜, 전략, 유연함, 적응을 뜻하는데 반해 비아는 힘과 폭력, 돌진, 지배를 의미한다. 바로 오딧세우스가 메티스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비아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킬레우스를 들 수 있다. 이 둘은 단순히 “힘센 영웅 vs 머리 좋은 영웅”의 차이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어떤 인간형을 이상적으로 보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비이다. 《일리아스》가 비아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오딧세이아》는 메티스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메티스(mêtis)는 단순한 기술적 영리함 이상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메티스는 원래 신적 차원의 능력이기도 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오딧세우스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이 메티스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아테나의 어머니 이름 자체가 '메티스(Metis)'이다. 즉 메티스는 인간의 잔꾀 정도가 아니라 세계의 불확실성을 다루는 신적 지혜에 가까웠다.
하지만 메티스는 완전히 선한 능력은 아니다. 거짓말, 속임수, 계산, 조작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딧세우스는 자주 거짓말하고 사람을 시험하고 교묘하게 행동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인간적인 영웅이기도 하다. 완벽한 신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인간이다.
메티스의 어두운 면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오딧세우스는 진실한 인간이라기보다 '가면의 인간'이다. 그는 계속 이름을 숨기고 변장하고 역할을 바꾼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오딧세우스를 '고정된 본질이 없는 인간', 즉 근대적 자아의 선구자로 보기도 한다. 반면 아킬레우스는 단순하지만 투명하다. 그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싸우고 죽는다. 그에 비해 오딧세우스는 훨씬 복합적이고 내면적이다.
메티스는 근대적 합리주의의 핵심인 이성(reason)과도 결이 다르다. 이성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라면 메티스는 직관, 경험, 즉흥성, 감각적 판단에 더 가깝다. 현대 슬롯에서 많이 거론하는 현장 감각, 눈치, 위기관리 능력, 협상력에 가깝다. 현대 조직슬롯에서는 논리만으로 움직이는 사람보다 상황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그래서 오딧세우스는 놀랍도록 현대적인 영웅처럼 보인다. 그는 전사라기보다 협상가, 외교관, 정치가, 생존 전문가에 가까운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현대인은 거대한 전쟁 대신 정보, 경쟁, 유혹,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딧세우스는 여전히 살아 있는 인간형이다. 괴력을 가진 영웅이라기보다 끝내 귀향의 목표를 달성하는 인간. 바로 그것이 오딧세우스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오딧세이아는 단순한 전쟁 영웅담이 아니다. 오딧세우스는 수없이 실패하고 유혹당하고 두려워하고 되돌아가며 살아남는다. 그를 끝내 귀향하게 만든 힘은 괴력이나 무력이 아니라 메티스였다. 예측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실천적 지혜, 메티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고대 그리스 인간형이 바로 오딧세우스에게서 구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