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성벽과 AI, 그리고 쪽문

AI는 밤새 쪽문을 찾는다

by최재운

1453년 5월 29일 새벽, 콘스탄티노플. 이 도시의 육지 쪽은 길이 5.7킬로미터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막고 있었다. 폭 20미터 해자, 그 뒤에 높이 9미터 안팎의 외벽, 다시 그 뒤에 높이 12미터, 두께 5미터 안팎의 내벽이 서고, 내벽에는 탑이 96개 솟아 있었다. 5세기에 세운 이 성벽은 천 년 동안 육지 쪽에서 한 번도 뚫린 적이 없었다.


오스만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들고 온 답은 대포였다. 그 유명한 우르반의 거포다. 헝가리 출신 기술자 우르반은 본래 비잔틴 황제에게 먼저 찾아간 사람이었다. 황제는 그의 품삯도, 대포를 부을 재료도 댈 수 없었고, 우르반은 그 길로 술탄에게 갔다. 그가 만든 대포는 길이가 8미터, 쏘는 돌 포탄이 270킬로그램이었다. 장전에 세 시간 가까이 걸려 하루 몇 발이 고작이었지만, 그 몇 발이 53일 동안 성벽을 두드렸다.


허나 그날의 기록에서 가장 오래 회자되는 대목은 대포가 아니다. 비잔틴 역사가 두카스가 전하는 바로는, 96번 탑 옆 성벽 한 귀퉁이에 케르카포르타라는 작은 쪽문이 있었다. 그날 아침 그 문이 실수로 열려 있었고, 오스만 병사 쉰 명 남짓이 그리로 들어와 안쪽 성벽 위에 깃발을 올렸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등 뒤에 나부끼는 적의 깃발을 보고 흔들렸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지금도 갈린다. 후대의 발굴에서 그 자리에 문이 있었다는 흔적이 나오지 않아, 두카스가 지어냈거나 다른 문의 전설이 옮겨 붙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허나 사실이든 전설이든 이 이야기가 570년을 살아남은 데는 이유가 있다. 천 년 성벽이 무너진 자리가 8미터 대포가 아니라 잠그지 않은 쪽문이었다는 결말이, 지키는 일의 본질을 정확히 찌르기 때문이다.


지키는 쪽은 5.7킬로미터를 전부 지켜야 한다. 뚫는 쪽은 한 곳만 찾으면 된다.


챗GPT로 성생


2026년의 쪽문


지난 9월 27일부터 10월 1일 사이, 국내 은행들이 차례로 뚫렸다. KB국민, 신한, 하나, BNK부산은행에 이어 예가람저축은행과 웰컴저축은행, 현대캐피탈까지 7개 금융회사에서 정보 유출이 확인됐다. 신한은행에서만 2만 5,700여 명의 이름과 연락처, 연 소득, 산출된 대출 한도가 유출됐고, 예가람저축은행에서는 약 4만 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연락처가 털렸다. 금융위원회는 10월 4일 전 금융권 긴급 점검회의를 열었고, 금융감독원은 약 500개 금융회사에 12개 항목의 점검표를 내려보냈다.


곱씹어 볼 대목은 어디가 뚫렸는가다. 인터넷뱅킹도 모바일뱅킹도 아니었다. 신한은행은 대출모집인이 고객의 대출 신청을 넣고 승인 여부를 확인하는 간편조회 서비스였고, 국민은행은 직원용 모바일 업무지원 시스템, 하나은행은 영업지원 시스템, 부산은행은 외주 개발 서버였다. 금융위원회는 대출모집인과 임직원이 업무 편의로 쓰는 외부 웹페이지와 서버, 관리가 느슨한 영역에서 사고가 났다고 정리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그날 회의에서 "아무리 견고한 보안체계를 갖추고 있더라도 관리되지 않는 하나의 빈틈이 전체 보안체계의 취약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금고는 단단했다. 뒷문이 열려 있었다.


같은 공격을 받고도 우리은행과 NH농협은행, 새마을금고는 유출이 없었다. 금융보안원 박상원 원장은 취약점을 미리 보완했거나 다중인증을 적용한 경우 침입을 차단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했다. 우리은행은 대출모집인 서비스에 인증서와 스마트폰 인증 두 단계를 걸어 두었고, 농협은행은 대출 고객 정보를 내부 직원만 모을 수 있게 해 두었다. 성벽의 높이가 아니라 쪽문의 빗장이 승부를 갈랐다.


밤새 문고리를 돌리는 기계


여기까지는 여느 해킹 사건과 다를 것이 없다. 이번 사건이 보안 업계 바깥까지 번진 까닭은 공격에 쓰인 도구에 있다. 금융보안원이 신한은행 공격 서버를 역추적했더니, 웹페이지 제목 자리에 중국어로 '아르텍스(ARTEX) 자율 침투테스트 콘솔'이라는 문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침투 테스트란 보안 전문가가 해커 흉내를 내며 제 회사 시스템을 미리 공격해 보고 구멍을 찾는 일이다. 사람이 하면 며칠씩 걸리는 비싼 일이다. 아르텍스는 그 일을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게 맡겨 자동으로 돌리도록 만든 오픈소스 도구다. 중국어권 개발자들이 깃허브에 공개했고, 바이두가 연 대회에서 우승까지 했으며, 별을 1,600개 넘게 받았다. 설정 화면에 클로드나 GPT의 접속 키를 넣으면 돌아간다. 본래는 지키는 쪽의 도구다. 그 도구가 해커 손에 들어갔다.


여기서 과장은 금물이다. AI가 스스로 은행을 털기로 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도구를 썼고, 그 도구 안에 AI가 들어 있었다. 박상원 원장의 설명으로는 이번 공격은 시스템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조회되는 고객 정보를 반복해서 긁어간 방식이었고, 그래서 자금 이체 같은 직접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 박 원장은 빠르고 반복적인 공격 양상으로 미루어 AI를 활용한 것으로 본다면서도, 같은 IP와 같은 수법이라는 것이지 같은 사람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당국도 아르텍스가 실제 공격에서 어디까지 쓰였는지는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


허나 바로 그 점이 더 무섭다. 새로울 것 없는 수법으로 며칠 사이 일곱 곳이 뚫렸다. 차단하면 IP를 바꿔 다시 들어왔고, 은행마다 두세 개의 IP가 겹쳤다. 사람 손으로 하던 문고리 돌리기를 기계가 밤낮없이 한 셈이다.


이것이 AI가 바꾼 것의 정체다. 대포가 더 커진 것이 아니다. 쪽문을 찾는 비용이 떨어진 것이다. 보안기업 티오리의 박세준 대표는 이를 두고 공격 비용이 사라졌다고 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케르카포르타를 발견한 것은 운이었다. 5.7킬로미터 성벽에서 하필 그 문을, 하필 그날 아침에 마주친 병사 쉰 명의 운이었다. 지금은 운이 아니라 통계다. 문이 충분히 많으면 하나는 열려 있고, 쉬지 않고 돌리는 기계는 그 하나를 결국 찾는다. 지키는 쪽은 전부 지켜야 하고 뚫는 쪽은 한 곳만 찾으면 된다는 오래된 비대칭이, 찾는 비용이 사라지면서 한층 공격자 쪽으로 기울었다.


찾는 속도와 닫는 속도


이 변화는 서울의 은행보다 먼저 실리콘밸리에서 예고됐다. 지난 4월 앤트로픽(Anthropic)이 공개한 미토스(Mythos) 이야기는 앞서 다룬 바 있다. 27년 동안 아무도 찾지 못한 오픈BSD의 결함을 찾아내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40여 기관에만 먼저 건네진 그 모델이다. 그로부터 한 달쯤 뒤 앤트로픽은 미토스가 한 달 만에 전 세계 핵심 소프트웨어에서 1만 건 넘는 고위험 취약점을 찾아냈다고 밝히며 이렇게 적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취약점을 찾는 속도가 보안 발전의 한계였다면, 이제는 AI가 너무 많은 취약점을 찾아내기 때문에 이를 검증하고 공개하며 패치하는 인간의 역량이 병목이 됐다고.


이 한 문장이 문제의 전부다. 쪽문을 찾는 일은 자동화됐다. 닫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일이다. 예산을 따고, 결재를 받고, 담당자를 정하고, 업무 편의로 열어 둔 문을 닫자고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 찾는 쪽은 기계의 속도로 달리고 닫는 쪽은 조직의 속도로 걷는다. 이번 사건에서 뚫린 자리가 하나같이 "업무 편의를 위해" 열어 둔 문이었다는 사실은, 이 간극이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관성에서 벌어진다는 뜻이다.


물론 지키는 쪽도 기계를 쓰기 시작했다. 이억원 위원장은 "AI 공격은 AI로 방어"해야 한다고 했고, 우리은행은 보안기업 티오리의 도구로 외부에 노출된 시스템을 사람 대신 쉬지 않고 점검하고 있다고 밝혔다. 찾는 속도를 기계로 따라잡겠다는 것이다. 박세준 대표는 뒤집어 보면 방어자의 시대이기도 하다고 했다. 찾는 기계를 지키는 쪽이 먼저 돌리면 된다는 뜻이다. 맞는 방향이다. 허나 어떤 AI도 "이 문은 닫자"는 결정을 대신 내려 주지는 않는다. 기계는 열린 문의 목록을 내밀 뿐이고, 그 목록 앞에서 편의와 안전 사이의 저울질을 하는 것은 끝내 사람이다.


문을 닫는 법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이번에 당국이 은행에 시킨 일이 그대로 답이 된다. 거창한 신기술이 아니라 쪽문을 세고 닫는 일이다.


첫째, 바깥에서 보이는 문부터 센다. 금융감독원이 500개 금융회사에 내려보낸 점검표에는 외부에 노출된 시스템과 서비스를 빠짐없이 적어 내라는 항목이 들어 있다. 홈페이지, 관리자 로그인 화면, 협력사용 조회 페이지, 원격접속 프로그램, 몇 년 전 행사 때 만들고 잊은 페이지. 은행도 제 문을 다 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뚫리고 보니 모집인이 업무 편의로 쓰던 조회 화면이었다. 회사든 학교든 관공서든 다르지 않다. 목록이 없으면 지킬 수도 없다.


둘째, 비밀번호 하나로 열리는 문에는 빗장을 하나 더 건다. 박상원 원장이 피해 유무를 가른 요인으로 꼽은 것이 다중인증이었다. 스마트폰 인증이든 인증서든, 한 번 더 묻는 문은 기계가 밤새 돌려도 열리지 않았다. 알려진 취약점의 보안 패치를 미루지 않는 것, 퇴사자 계정을 그날 닫는 것도 같은 줄에 선다. 당국은 한발 더 나아가 당장 고칠 수 없는 서비스는 아예 닫으라고 했다. 쓰지 않는 문은 잠그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이 답이다.


셋째, 문 안에 필요 이상의 것을 두지 않는다. 신한은행에서 연 소득과 대출 한도까지 새어 나간 것은 모집인용 조회 화면이 거기까지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접근 권한과 조회할 수 있는 정보를 최소한으로 줄이라고 했다. 없는 정보는 털리지 않는다.


개인에게도 할 일이 있다. 신한은행은 홈페이지에서 제 정보가 유출됐는지 확인할 수 있게 했고 피해를 전액 보상하겠다고 했다. 확인은 하되,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이름과 연락처, 연 소득, 대출 한도를 쥔 사람이 거는 전화는 그럴듯할 수밖에 없다. 은행이나 수사기관을 대며 돈이나 인증번호를 요구하는 전화는, 그 전화가 내 사정을 아무리 정확히 알고 있어도 일단 끊고 내가 직접 다시 거는 것이 맞다. 유출된 뒤의 보안은 나를 잘 아는 전화를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슬롯의 몫도 있다.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김승주 교수는 이번 사건을 두고 "대문만 굳게 지키면서 정작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쪽문들을 방치"해 온 결과라고 했다. 형식적인 보안 대처가 쌓이고 쌓여 한계를 넘은 '보안 부채'라는 것이다. 그가 내놓은 처방은 국가 차원의 사이버 자산 집중 정비 기간을 두고, 그 기간에 스스로 보안 부채를 찾아 신고하고 개선 계획을 낸 기관과 기업에는 제재를 유예하거나 감경하는 한시적 '세이프 하버'를 함께 운영하자는 것이다. 뚫린 사실을 숨기는 쪽이 유리한 구조에서는 쪽문이 영원히 닫히지 않는다. 황정아 의원도 침해사고를 신속히 신고하고 적극 대응하는 기업에 보안 투자와 기술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벌이 아니라 신고가 이익이 되는 구조. 쪽문을 찾는 비용이 바닥까지 떨어진 시대에 닫는 비용을 낮추는 것은 결국 제도의 일이다.


우리의 케르카포르타


이 이야기를 은행의 일로만 읽으면 절반을 놓친다. 한국인터넷진흥원에 신고된 침해사고는 지난해 2,383건으로 역대 최고였고, 열에 여덟은 중소기업이었다. 은행이 뚫린 것이 뉴스가 될 뿐, 쪽문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쪽문이 열린 대가는 성을 지키던 사람이 아니라 성 안에 살던 사람이 치른다. 돈은 바로 빠져나가지 않았지만, 새어 나간 정보로 걸려 올 전화는 지금부터다.


570년 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제 몫을 했다. 천 년을 버텼다. 두카스의 기록대로라면 무너진 것은 성벽이 아니라, 성벽이 충분히 높다고 믿은 나머지 아무도 다시 확인하지 않은 작은 문이었다. 그 문은 실수로 열려 있었다. 오늘 우리의 쪽문은 실수가 아니다. 편의로 열어 두고, 바빠서 잊고, 괜찮겠지 싶어 그대로 둔 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 문 앞에는 밤새 문고리를 돌리는 기계가 와 있다.


성벽을 더 높이 쌓는 경쟁은 이미 기계들끼리의 일이 됐다. 사람에게 남은 일은 단순하고, 그래서 어렵다. 우리가 열어 둔 문이 몇 개인지 세는 일, 그리고 그중 마지막으로 빗장을 확인한 것이 언제였는지 묻는 일이다. 우리 슬롯의 케르카포르타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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