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에게도 봄날은 있었다 비록 퇴임 통보를 받았지만, 나에게도 봄날이 있었다. 신규 프로젝트 기획 자료를 늦게까지 마무리하고, 회사 근처에서 후배 연구원 과 늦은 저녁을 겸해 한 잔 하고 있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는 받지 않는 원칙이 있었기에 무시했다. 잠시 후, 그 번호로 문자가 왔다. "전화 바랍니다. 기술원장." 헉. 원장님의 번호였구나. 무슨 일이지? 오늘 오전에도 보고 드리느라 뵜었는데, 또 한 소리 하시려고 그러 나? 신규 프로젝트 기획으로 원장님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터에 문자를 보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 또 야단치시면 맞지 뭐. 그리고, 될 때까지 설득해야지. 바이오를 전공한 내가 반도체 전문가에게 바이오의 업의 개념을 이해시킨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밖에 나가서 그 번호로 전화를 드렸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조금 전엔 제가 식사를 하느라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이번 정기 임원 인사에서 박 수석 ( 연구원) 을 상무로 승진시키기로 했습니다. 더 잘하라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니, 마음껏 한 번 해보기 바랍니다. 축하합니다.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한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토록 까탈스럽게 대하시며 당근 없이 채찍질만 해대시던 분이 웬일일까? 당근을 아껴놨다가 트럭이 넘칠 때까지 버티면 주시려고 했던 걸까 ? 내일 아침 언론에 정식 보도될 때까지는 비밀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식당에 들어온 나는 애써 웃음을 숨기며 하던 대로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아 정말 전화까지 해서 야단을 치시네.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렇게 원장님 성토 대회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꽃집이 보이길래, 결혼 이후 처음으로 꽃을 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한 아내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이었다. "늦었네요. 저녁은?" 나는 말없이 장미 한 다발을 아내에게 건넸다. 황당해하던 아내는 눈치도 없이 물었다. "갑자기 웬 꽃이에요? 무슨 사고라도 쳤어요?" 나는 비밀 유지 약속을 어기고 아내에게 얘기했고, 아내는 친정과 시댁에 빛의 속도로 알렸다. 양가 친척분들의 축하 전화를 모두 받고 나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https://brunch.co.kr/@pjhwan071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