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흔 중반. 예전 같으면 중늙은이 취급을 받았을텐데 평균 수명도 늘고 육체적인 혹사도 덜한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아서인지 그나마 청장년층으로 분류되는 현실을 기뻐해야 할 지는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 다행스러운 건 한국 슬롯에서 입시지옥도 치렀고, 민주화 열풍도 쐬어봤으며 숨이 턱에 차는 슬롯생활을 경험한 세대라는 점이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후 근대화 과정을 상흔으로 간직한 세대를 부모로 둔 덕에 그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덤이라 할 수 있다.
감히 이 슬롯의 주축이라고도 말할 수는 없겠으나 아직은 뒷전에 물러 서기에는 이르고 전면에 나서기에는 왠지 겸연쩍은 나이에 이르고보니 그 중간쯤 어디에서 앞과 뒤 뛰어가고 뒤처진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걸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좋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1. 바카라 권하는 슬롯 예외없이 '40대 과로사'라는 사인은 있으되 치료약은 없던 시기를 뚫고 지나왔다. 자의든 타의든 주전으로 뛰지 않으니 벤치에 앉아 옆에 놓인 바카라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됐다. 내게 있어 바카라읽기는 생산성과 효율성이 극히 낮은 작업이다. 신체적으로는 노안은 이미 와 있고, 예전처럼 총명하지도 않다. 기억력이 떨어져 감탄하며 읽은 짧은 문구조차 다시 펼쳐보지 않으면 쓰인 어휘 그대로 되뇌이지 못한다. 자존심만 숨이 죽지않아 어디 적어놓거나 줄을 긋지도 않으니 그 또한 문제다.
내 손을 거쳐간 바카라들이 그대로 온전하고 줄을 긋지 않는 이유는 또있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뛰고 읽게 된 바카라을 내 자식은 좀 더 일찍 시작했으면 하는 당부로 그들 손에 깨끗히 건네주고 싶어서다. 또 하나는 이미 읽었던 바카라이라도 다시 꺼내 읽는 경우에 밑줄 친 문장에만 눈길이 가는 폐단이 있어서다.
내 경우 한 권의 바카라 안에서 내 인생을 흔들만한 한 줄의 문장을 찾기란 노르웨이 여행 중에 만난 빙하가 녹아 으렁대며 넘실대던 그 강에서 사금을 걸러내는 것만큼 힘들다. 대부분은 수긍하거나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마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따르기엔 이미 게을러져서인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안될 것같으면 일찌감치 초장에 덮는다. 그래서 바카라을 고르는 데 무척 신중할 수 밖에 없다.
출판업계는 불경기라는데 술보다는 바카라을 권하는 슬롯가 된 것마냥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경로로 특정한 바카라을 권한다. 경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호기심과 괜한 호기를 부려 산 '반일 종족주의'는 처음 몇장 읽고 건너 뛰다 마침내 다 읽지도 못하고 꽂아뒀다. 그런데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니 기함하지 않을 수 없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사줘서 배 터지게 한 셈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남의 바카라들을 그대로 베껴서 짜깁기 한 바카라들이 다단계식 서평과정을 거쳐 베스트셀러가 되는 판국이다.
고전보다 자기계발서가 더 잘 팔리고, 매스컴에 자주 등장한 학원 강사의 저질 인문서적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노학자의 그것보다 좋은 매대에 놓여 있다.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자신이 읽은 바카라을 시리즈로 권하는 사람은 옷가게 점원처럼 여긴다. 나는 옷을 내가 사 입으니 그럴 수도 있다. 옷가게 점원에겐 내 몸에, 내 피부색에 맞는 지가 중요하지 않다. 재고가 넉넉한지 마진이 좋은지가 관건이다. 기껏해야 스스로 입어보고 만족한 자신의 경험이 전부다. 내가 입을 옷이다. 그저 자신이 입은 모습만 보여주면 족하다. 스쳐지나가는 누군가의 눈에 들면 그 사람은 그 옷을 찾게 된다. 자신의 체형도 모르고 사게 되는 실수까지 바카라임 질 이유는 없다.
바카라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에 절반쯤 동의한다. 내가 먹은 음식에 얼마만큼이 배설되지 않고 내 몸에 영양분으로 자리 잡는지 모르는 것처럼 진리도 얼마나 온전히 내 것으로 걸러져 곱게 가라앉느냐하는 것이다. 가라앉아만 있어도 안된다. 어떤 때는 휘저어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게도 하고 또 어느 경우에는 조용히 가라앉게 지켜보는 지혜도 필요하니 어려운 문제다. 스무첩반상에 눈이 휘둥그레해져서 맛있다고 한 번에 많이 먹거나 편식을 하게 되면 반드시 탈이 나게 마련이니 천천히 오랫동안 씹고 침으로 삭혀 삼키려고 한다.
스스로에게 고맙고 다행스러운 건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바카라읽기가 되어서다. 어려서 좀도둑질할 때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푼돈정도 노린 정도지만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른 지금은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제대로 배워서 한 몫 챙길 요량이다. 한 몫 단단히 챙겨야 나눠 줄 것 아닌가. 몇 년전부터 강단에 올라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 또한 기쁜 일인데 혹여나 얕은 밑천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채우기를 게을리하지 하지 말아야 이유가 하나 더 생겼으니 이래저래 다행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