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박 속의 인정을 전하는 소리판
서명희 명창, 봄의 기운을 담은 소리, 흥보의 정직한 마음과 박 속의 인정을 전하는 소리판
[세상을 읽는 힘, 시사월드=by 임진수]=소리꾼의 길이란 찰나의 화려함 뒤에 숨은 깊은 그늘까지도 온전히 자신의 숨결로 품어내야 하는 고독한 수행과 같다. 무대 위 쏟아지는 조명은 소리꾼의 땀방울을 보석처럼 빛내지만, 그 이면에는 수만 번의 독공(獨工)으로 다져진 한(恨)의 퇴적층이 자리하고 있다. 소리꾼 서명희가 토해내는 성음은 세상사 외침의 목소리의 울림을 넘어, 유년의 순수했던 기억과 반세기 소리 인생의 굴곡진 서사를 하나로 엮어내는 내면의 고백이 소리꾼의 길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소리는 화려한 기교를 뽐내기보다 마음의 바닥에 가라앉은 고요한 진심을 길어 올림이다 때로는 칼날 같은 서슬로 청중의 가슴을 베고, 때로는 솜이불 같은 온기로 멍든 영혼을 보듬는 그 이중적인 미학은 소리꾼이 평생을 바쳐 일궈낸 내면의 풍경이다. 이제 그 그늘진 함의조차 찬란한 빛으로 승화시킨 소리꾼 서명희의 거대한 서사 속으로 들어가 간다.
2026년 4월 25일, 서울 강남의 한국문화의 집 KOUS는 한 인간의 생애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시간이 교차하는 거대한 대서사시의 현장이 되었다.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소리를 품어온 서명희 명창의 ‘홍보가’ 완창 무대는 거창한 공연을 넘어,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한(恨)과 인(仁)의 철학이 소리의 무늬로 각인되는 경이로운 시간이었다.
유년의 약국, 소리의 씨앗이 움튼 자리
서명희 명창의 소리 인생은 그 시작부터 한 편의 시적 서사와 닮아 있다. 유년시절,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들르던 동네의 한 약국은 그녀의 첫 번째 무대였다. 어린 소녀의 흥을 알아본 약사는 ‘오늘 배운것 한번 해봐라”는 권유에 스스럼없이 목청을 높였던 그 유년의 기억은, 오늘날 명창 서명희를 있게 한 가장 순수한 향기다. 약국에 갈 때마다 울려 퍼졌던 그 맑은 노래는 50년이 지난 지금, 대지를 흔드는 거대한 울림이 되어 돌아왔다.
1부: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은 ‘천봉 생무록지인’의 마음
공연의 문을 연 1부에서 서명희 명창은 비극적인 가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선한 본성을 서슬 퍼런 목소리로 그려냈다. '대장군방 벌목' 대목으로 시작된 소리는 흥부가 형 놀보에게 쫓겨나며 겪는 설움을 절절하게 담아냈다. 특히 자식들을 위해 형 대신 매를 맞으러 가는 '매품 팔러 가는 대목'에서 그녀가 토해낸 애절한 성음은 관객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자신도 울었고, 관객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흥보가 특유의 섬세함은 '가난타령'에서 정점에 달했다.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는다(천봉 생무록지인)”는 구절을 읊조릴 때, 소리꾼은 절망의 끝에서도 희망과 정직을 놓지 않는 흥보의 고귀한 심성을 소리로 증명했다.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 따뜻한 인심이 공연장 구석구석에 스며들며 관객들의 마음까지 정화시켰다.
2부: 기적 같은 보은과 통쾌한 권선징악의 미학
잠시의 휴식 후 이어진 2부는 흥겨운 '제비노정기'로 활기차게 시작되었다. 강남에서 박 씨를 물고 오색구름 사이를 지나 돌아오는 제비의 여정이 화려한 계면조 선율로 펼쳐지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박 타는 대목'이었다. 첫째 박에서 쏟아지는 돈과 쌀, 둘째 박의 비단, 셋째 박에서 지어지는 화려한 집까지, 서명희 명창은 역동적인 너름새를 통해 박 속에서 피어나는 기적을 생생하게 구현했다. 반면, 탐욕에 눈이 멀어 박을 탔다가 벌을 받는 '놀보가 박 타는 대목'은 해학과 풍자의 극치였다. 명창은 놀보의 악행을 묘사하면서도 그 이면에 담긴 인간의 어리석음을 날카롭고도 철학적으로 짚어내며 관객들에게 큰 웃음과 통쾌함을 선사했다.
2시간의 대서사... 암기를 넘어선 영혼의 토로
필자가 목격한 가장 놀라운 지점은 2시간에 달하는 방대한 사설을 한 치의 오차 없이 토해내는 초인적인 서사력이었다. 수만 개의 단어를 완벽히 암기하여 읊조리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창의 골수(骨髓)에 새겨진 인생의 무늬이자, 가슴에 묻어둔 한과 심성이 소리의 형상을 빌려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는 '영혼의 복기'였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우는 우리네 인생사가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대서사시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소리 끝에 남은 조용한 울림과 역사
마지막 ‘뒤풀이’와 함께 소리가 멈춘 순간, 공연장에는 거대한 여운이 감돌았다. “세상에 내려온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쓰임이 있다”는 가르침처럼, 서명희 명창은 흔들리는 순간 속에서도 소리의 길을 지켜온 자신의 삶을 대중 앞에 증명해 보였다. 흥보와 놀보의 갈등 속에는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남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이 투영되어 있었다.
원기중 중앙대학교 박사의 깊이 있는 해설과 김난영 고수의 단단한 북장단은 서명희 명창의 소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2026년 봄날, 우리에게 ‘진정한 인정’이 무엇인지 일깨워준 이 무대는 인간 서명희의 한과 심성이 깃든 예술의 정점이었다. 소리 끝에 조용히 맺힌 그 울림은 이제 관객들의 가슴속에 지지 않는 꽃으로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