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와도 같은 길을 통해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생각한다. (너무도 뻔한 문장으로 읽힐 테지만) 아침나절 글을 쓰지 않은 날은 종일토록 몸이 아프다. 이 클리셰를 기억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상황은 쉽지 않다. 체중조절에 들어간 아내는 일체의 외식을 중단했다. 그렇다면 나는, 단 한 방울도 바깥술을 마실 수가 없다. 술이란 무엇인가? 마치 드러눕는 것과 같지 않은가. 방 안으로 더 깊이 들어박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드러눕지 못하고 더 이상 드러눕지 못하는 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다시, 글을 쓴다. 훈 선배는 담배를 끊었고, 또 다른 '훈'인 훈 후배는 내 제안을 거절하고 있다. 오늘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비하여 수많은 종교의 창시자들이 답을 준비했지만 단호히 거절한다. 세상은 위트가 지탱한다는 말 한마디가 더 가치롭다. (내가 써놓고?) 김정운 교수와 김영민 교수의 바카라을 번갈아 읽다가 가와바다야스나리가 활동하던 시기 요절한 일본작가의 단편집을 읽노라면, 위트의 뿌리를 캐고 싶어진다. 오늘은 일요일 [마일즈 데이비스, In A Silent Way]를 듣다 문득, 이 집요하고 서늘한 채집의 사운드에서 위트를 찾아내고 싶어진다. 김정운의 글에서 읽은 '피부는, 뇌가 몸의 표면으로 나와 형성된 것'(정확한지 몰겠음)이란 표현이 내 몇 시간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역시 김영민 식 위트가 이미지로 오도카니 떠올랐다. 김영민은 논어를 해독하며 그간의 논어 주석을 해설하기도 하는데 그간의 성과를 '어떤 조용한 방식'으로 미친 듯이 까버린다. 김정운의 글이 자신의 입담을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과 비슷하다. 오늘의 결론은 역시, 세상은 위트가 지탱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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