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영 작가 드라마에 대하여
노을빛 바람에 오월의 아카시아향이 떠다닌다.
이태원을 걸었다. 역 근처 화단 바위 위에 친구가 앉아있다. 이 동네 아카시아향이 진동을 하네. 우리의 인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괜히 친구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구워주시는 치킨바비큐집에 갔다. 이태원 로컬들이 다니는 가게. 손님이 꽉 차서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주방에서는 연기가 올라오는 그릴 위 손길이 바쁘다. 우리는 물었다. “2층으로 올라갈까요?”
할머니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서 계속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안으로 들어가도 미로처럼 방이 계속 이어져 있다. 코너를 몇 번 돌자 빈 테이블이 보인다. 자리를 잡고 치킨을 시켰다.
숯불구이 치킨이 나왔다. 빨간 양념구이와 소금구이. 벌써 왁자해진 가게 안에 외국인 손님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풋- 맛있는 건 알아가지고.
우리도 한 입 베어 물었다. 눈이 커진다. “여기 또 올 거 같은데?”
치킨이 부드러웠다. 기름기가 빠져서 담백하고 양념도 지나치지 않았다.
옛날식 양배추 샐러드도 오랜만에 먹으니 아삭하고 시원했다. 감자튀김도 시켰다. 샐러드 더 줄까요? 할머니가 물으신다. 네. 초등학생처럼 합창을 하고 메뉴를 기다린다. 혼자 운영하시는지 여기저기 오가며 바쁘시다. 조금 더 기다려야 나올 것 같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드라마 이야기가 들려온다. 요즘 시청률은 변우석 드라마가 휩쓴다던데, 내 주변엔 온통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 이야기만 들려온다. 유난히 귀를 기울여서일까. 그쪽 테이블의 수다는 무르익어서 <나의 아저씨>까지 거슬러간다. 나에게까지 기억이 번져온다.
시리즈 후반부에 박동훈이 극장에 앉아있는 장면이 있다. 그동안 전화가 도청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그 애가 나의 하루를 빼곡히 듣고 있다. 기댈 곳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숨죽여 하나의 목소리에 의지한다.
그러니까 나의 아저씨가 아내의 불륜으로 고통받는 나날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게 전부다. 손에 닿을 수 없는 그의 고통이 그 불행이, 나에게 눈물이 된다. 온기라고는 없는 싸늘한 방에서 전화기 너머 나의 유일한 세계가 말을 걸어온다.
이지안, 전화 줘.
그 장면 설계에 깜짝 놀랐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전해져서 같이 울게 된다. 세상의 그 어떤 일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떻게든 버티게 된다. 그 한 사람이 없어서 세상이 깜깜해진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제목부터가 하나의 선언 같은 이 드라마의 인상적인 장면은 기찻길 앞이다. 영화사 PD와 무명 감독이 건널목에 멈추어있다.
한바탕 자신의 시나리오를 무참히 까이고 다시 마주친 두 사람.
‘창조자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만들 수 없다.’
그런 진리를 그렇게 마구 날려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길에는 언제나 그 걸림돌이 있었다. 혹시 내가 만드는 것이 가짜는 아닌가. 모르는 걸 다 아는 척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들이 길에서 보내는 수많은 시간들로 내가 지나온 길들이 겹쳐 보인다.
산산이 부서져 너덜너덜해졌어도 정확한 지적을 해주는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박살 난 감독이 다시 묻는다. 뭘 더 하면 될까요.
그녀는 답한다.
‘시나리오 보고 알았어요. 이 감독님은 사랑하는 게 없구나.’
이건 폭격일까, 고백일까.
뭐, 어느 쪽이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고백과도 같은 말들을 담담한 얼굴로 던지는 것이 박해영 드라마의 캐릭터들이고 이런 대화가 설렘의 방식이다. 아무리 진리라고 해도 그런 말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일이랍시고 전해줄 사람은 없다. 숨겨진 말풍선엔 이런 게 보인다.
‘그래서 너에겐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옆에 한 사람도 있어.’
굵직한 감자와 으깬 감자튀김이 섞여서 나왔다. 따뜻하고 포슬포슬한 감자를 씹는다. 샐러드도 한 접시 수북이 갖다 주셨다.
우리가 지나온 길에 놓친 것은 없었나. 뻔히 부족한 걸 알면서도 못 본 척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은 의외로 스스로를 잘 속인다. 상처를 피할 수 없다 해도, 같이 할 사람이 있으면 걸어갈 수 있다. 타인을 통해서 나를 거울처럼 바라볼 수 있다.
드라마는 말해준다. 같이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재밌는 거예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할 때 할머니는 카드를 밀다 말고 주방을 휙 들어가신다. 탈지도 모른다며.
우리는 힐끗 주방에서 치킨을 뒤집는 할머니의 손길을 가만히 바라본다. 고개를 숙여 치킨을 정성껏 살피는 눈길을 보며 이 집에 다시 오기로 마음을 굳힌다.
바깥으로 나오자 아카시아향이 코끝으로 전해진다. 창이 활짝 열린 2층을 보다가. 할머니가 고개를 갸웃하신 이유를 알았다. 2층은 전혀 다른 가게였다. 왜 2층까지 치킨집으로 봤지?
아카시아향에 취했을까. 5월의 밤, 아카시아는 조금 위험하다. 다시 나오니 노천마다 열어둔 창 사이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온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아카시아의 밤은 이 거리의 모두에게 닿아있다.
3호선 버터플라이 -무언가 나의 곁에
https://www.youtube.com/watch?v=_vqh33WhRAM&list=RD_vqh33WhRAM&start_radi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