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영화는 결국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에필로그

by레빗구미
영화관을 바라보는 밤^[1].png


영화가 끝나면 극장 안에 불이 켜진다. 조금 전까지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를 향해 걸어간다. 나도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극장 밖으로 나오면 조금 전까지와 다르지 않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바쁘게 걸어가고, 자동차는 도로를 달리고, 휴대전화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잠시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았던 것 같은데, 극장 밖으로 나오면 다시 내 삶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가끔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분명히 같은 장소로 돌아왔는데, 영화를 보기 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다. 조금 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가 마음에 남기도 하고, 잊고 지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떤 영화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경험을 반복해 왔다. 처음부터 영화에서 인생의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영화가 좋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했고,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구경하는 일이 즐거웠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싶어서 영화를 봤고, 때로는 답답한 마음을 잠시 잊고 싶어서 극장을 찾았다.


영화는 내게 가장 익숙한 취미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에는 영화 속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궁금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그 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했을지가 궁금해졌다. 주인공의 실패를 보면서 내가 실패했던 시간을 떠올렸고,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과 다투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부모와 자녀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볼 때면 어느새 부모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영화는 그대로인데, 영화를 보는 내가 달라지고 있었다.


어릴 때는 세상에 정답이 꽤 많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고, 어른이 되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많은 것을 알게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열심히 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가족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었고, 부모가 된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 불안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돈에 대한 고민은 나이가 들어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분명히 내가 선택한 삶인데도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두고 후회하기도 했고,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 같다가도, 다른 날에는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럴 때 영화 속 사람들을 보았다.

<더 레슬러>를 보면서는 실패한 사람의 삶을 생각했다. <비포 미드나잇>을 보면서는 사랑이 계속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돌아봤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면서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가족에 관한 영화들은 조금 더 가까운 곳을 바라보게 했다.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나, 부모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나, 그리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된 나를 생각하게 했다.

그렇게 하나의 영화를 보고 나면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나는 좋은 남편일까.

좋은 아빠가 되어가고 있을까.


지금의 나는 어릴 때 꿈꾸던 어른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물론 영화를 본다고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나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내린 선택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었다. 영화가 끝났다고 해서 내가 안고 있던 문제가 해결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다음 날이면 다시 회사에 가야 했고, 해야 할 일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족과 의견이 맞지 않는 날도 있었고,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영화 한 편을 봤다고 내가 갑자기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적어도 한 가지는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마음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면 그 사람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인물이 잘못된 선택을 할 때면 쉽게 비난하기보다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는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왜 아직도 그 일을 잊지 못할까.

아내와의 사소한 갈등, 아이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들이 질문으로 계속 남았다.


그 질문들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도 많다.


다만 예전보다 조금 더 자주 멈춰서 생각하게 된다. 아이를 혼내고 내가 맞나를 생각하고, 아내를 보며 사랑은 왜 변할까를 생각한다. 글쓰기를 하면서도 계속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써야할까도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내 삶에 무언가를 남기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바카라에 담긴 이야기들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영화를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 편씩 써 내려가다 보니 영화보다 내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 실패했던 기억을 꺼내고, 사랑했던 시간을 돌아보고, 가족과 함께 살아온 날들을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떠올렸다.


어떤 이야기는 쓰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을 다시 생각해야 했고, 내가 잘못했던 순간을 인정해야 할 때도 있었다. 차라리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편할 것 같은 기억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글을 쓰다 보면 그 시간들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의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과거를 좋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니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되는 일이 있고, 다시 돌아간다면 다르게 행동하고 싶은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까지 모두 내 삶이었다. 잘한 선택만 모아서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실패한 시간도 있고, 누군가를 미워했던 순간도 있다. 나 자신을 미워하고, 삶을 내려놓고 싶었 날들도 있다. 반대로 행복했던 날도 있었다. 그 많은 시간들 중에 대부분은 평범한 날들이었다.


그 모든 시간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번 연재 글을 쓰면서 하나의 질문에 계속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처음에는 영화 속 인물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내 삶이 보였다. 어떤 인물에게는 공감했고, 어떤 인물에게는 화가 났다.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동안 나 역시 조금씩 변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몇 년 뒤에는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주인공의 마음으로 봤던 영화를 언젠가는 부모의 마음으로 다시 볼 수도 있다. 지금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 장면이 나이가 더 든 뒤에는 오래 마음에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이 좋다.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예전과 다른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던 감정이 보이고, 이해하지 못했던 인물이 조금 가까워진다. 때로는 예전에 좋아했던 영화가 더 이상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도 괜찮다. 내가 그동안 살아왔다는 뜻일 테니까.


이 글을 쓰면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내 삶에도 참 여러 개의 산이 있었다. 실패의 산도 있었고, 사랑과 가족의 산도 있었다. 부모가 되어가는 동안 쌓인 산이 있었고, 불안과 후회로 만들어진 산도 있었다. 어떤 산은 아직도 오르는 중이다.


정상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길을 잃기도 하고, 이제는 다 이해했다고 믿었던 문제 앞에서 또다시 망설이기도 한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산들을 모두 넘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가끔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내게 그런 시간을 주었다.

잠시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다가, 결국 내 삶으로 돌아오는 시간.

나는 앞으로도 영화를 볼 것이다.


지금의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무엇을 더 하게 될지, 어떤 일을 후회하게 될지,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그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가끔은 영화 속 누군가의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을 돌아보고 싶다. 이해하지 못했던 나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잊고 있었던 마음을 다시 떠올리고,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내일을 상상하면서.


언젠가 또 한 편의 영화가 끝날 것이다.

극장 안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나도 그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올 것이다.

극장 밖에는 여전히 내가 살아가야 할 평범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날도 영화가 내게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영화는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수많은 영화를 지나 돌아온 곳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




*삽화 이미지는 AI를 이용해 생성하였습니다.

**영화 스틸컷은 포탈 사이트 영화 소개 페이지를 참고하였습니다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brunch membership
레빗구미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ISFJ - 영화에 대한 리뷰보다는 영화안에 담긴 감정들에 대해 씁니다. 영화의 긍정적인 부분을 전달하려 합니다. 세계최초 영화 감정 리뷰.

1,275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0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