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기 / 어크로스
각자도사 슬롯
송병기 / 어크로스
각자도생(各自圖生)하다 각자도사(各自圖死)하는 슬롯
각자도생(各自圖生)은 다소 놀랍게도 중국이 원조가 아니라 선조27년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레알 헬조선식 한자성어다. 왜군이 백성들을 도륙하고 있으니 각자 조심해 살길을 찾고 주변에도 널리 알려 방비 하라는, 말인지 방구인지(아무래도 방구같은) 하나마나한 소리를 준엄하게 지시한 기록이다.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역사에도 드문 3代가 전쟁과 기근을 겪지 않은 대평화시대에 살고 있기는 개뿔 우리는 여전히 각자도생중이다. 젊은 세대들은 취업과 스펙경쟁으로 지쳐가고, 중장년이 되면 사는것은 여러모로 더 고달프고 비교와 생존은 더 가혹하다. 매체에선 안정적인 노후비용을 해마다 늘려가며 산정하더니 이제는 10억을 웃돈다.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숨 내려놓고 남들 시선에서 좀 뻔뻔해져도 되는 노년조차 질병과 노화는 자기관리가 안된 사람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몸을 일으켜 희끗한 머리를 염색하고 경쟁이 심한 구립체육관에 새벽부터 줄서 아쿠아로빅을 등록한다. 나의 엄마나 시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이야기가 있다. 자손들 고생시키지 않고 집에서 잠자다 조용히 고통없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건강하고 조화로운 웰빙을 추구하며 살고,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는 깔끔하고 깨끗한 웰다잉도 준비해야하는 슬롯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송병기 교수의 <각자도사 슬롯>는 상당부분 개인의 몫으로 방기하고 있는 생애말기와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의제들을 아프게 조명하고 있다. 가족내에서 보통 간병은 거룩한 희생으로 프레임되어 여성의 무보수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아픈 노인들은 돌봄과 치료가 분리된 의료시장에서 적절한 돌봄과 치료를 받지 못한채 그 사이를 전전하며 천천히 또는 빠르게 죽음과 가까워진다. 장기요양보험급여 시행으로 요양원과 요양병원은 급증했지만 인력은 부족하고 노인들은 컨베이어 벨트위 상품처럼 거칠게 돌봐지고 있다. 더 이상 치료가 의미가 없는 환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적절한 완화치료를 하는 호스피스 병동은 대부분 공공의료원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고, 입원대상이 확대된다고 해도 현재는 말기암환자만으로도 수요가 벅찬 형편이다. 회생가능성도 없고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환자가 본인의 명확한 의사에 따라 담당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안락사법은 발의순간 슬롯에 파문을 남기고 여전히 계류중이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바카라에서 조망하고 비판하는 현실은 다소 아프고 절망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거슨 학자모먼트의 대안제시없는 비판과 회의주의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바카라에서 제기한 여러 문제들...돌봄에서의 시설과 탈시설화, 커뮤니티 케어, 호스피스, 요양원과 요양병원, 연명치료에 대한 시선, 안락사, 제사, 웰다잉.. 이런 의제들은 한편 죽음보다는 "삶"을 묻고 있기도 하다. 죽음은 내가 발 디딘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저 멀리 관문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나의 행복, 나의 연결망, 나의 유산, 내가 없고 나서도 존재하는 것들과 딱 붙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가 해야될 일이 있고 공동체가 해야될 일이 있고 각자가 해야될 일이 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점점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일단은 뭐 하던대로 각자 도생하되 느슨하게 섬처럼 연결해서 너울대는 파도에 약한 고리가 떠내려가지 않게 서로를 살짝씩 붙들고 살아야겠다. 우리에겐 서로가 선물이고 답이다. 바카라에서 소개한 공동체 community의 어원이 마음에 들어 옮겨본다.
" 영어 커뮤티니(community)는 라틴어 코무니카스(communitas)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함께'를 뜻하는 접두사 쿰(cum)과 존재의 상태를 가리키는 접미사 타스(tas), 그 사이에 위치한 명사 무누스(munus)로 구성되어 있다. 무누스는 의무, 봉사, 서비스, 직무, 선물을 의미하는 단어다. 철학자 로베트로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의 통찰을 참고한다면, 공동체란 우리 모두가 선물(gift)을 의무적으로 주고받는 관계망이다....선물은 단순히 물건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일부이고, 환대와 호혜다. A가 B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해서 B가 A에게 꼭 답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선물을 받은 B가 C에게 선물을 줄 수 있고, 또 C는 D나 E에게 선물을 줄 수도 있다. 그렇게 선물로 연결된 사람들, 즉 공동체 속에 있으면 결국 A도 누군가의 선물을 받게 된다. 뒤집어 말해, 그 선물은 '갚을 수 없는 빚'이기에 의무와 바카라임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양면성을 지닌 선물을 통해 유지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