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함은 왜 사람을 모욕하는가
박해영 작가의 작품,《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주인공 황동만은 아픈 고양이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채업자의 세계로 발을 들인다. 고작 170만 원이었던 빚은 눈더미처럼 불어나 어느새 1,000만 원을 훌쩍 넘어서고, 업자의 잔혹한 협박이 시작된다. 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순간, 영화감독 지망생인 동만은 악당의 상투적인 협박 방식을 시나리오에 빗대어 통쾌하고 날카로운 '감독 표 사이다 멘트'를 날린다.
"야. 멘트가 왜 그렇게 하나같이 다 진부하냐? 뭐, '입금 안 하면 연락처에 있는 인간들한테 전체 문자 쏜다'? 그다음에 나올 대사는 뻔하지. '지인들 피눈물 흘리게 하겠다', '밤길 조심해라'… 야, 불법 추심 양아치들도 대본 기계에서 뽑아 쓰냐? 야 이 새끼야, 나 20년 동안 시나리오만 붙잡고 산 황동만이야! 삼류 악당도 너처럼 대사 쓰면 제작자한테 대본 뺨때기 맞아! 악다구니를 쓰려면 좀 신선하게 하든가! 170만 원 빌려 가놓고 이자만 500 넘게 처먹었으면서, 남은 잔금이 1100이라는 게… 그 개 같은 설정부터가 이미 관객들한테 외면받는 통속극이라고, 새끼야!"
불어난 빚 독촉과 사채업자의 서슬 퍼런 위협 앞에서도 그는 기죽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비극을 '삼류 시나리오'라 일갈하는 동만의 뼈 때리는 사이다 멘트는, 돈 앞에 무력했던 인간이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감독다운 반격이다.
황동만의 분노 포인트는 협박 그 자체가 아니다. 황동만을 진짜 폭발하게 만든 것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미는 사채업자의 대사가 지독하리만치 ‘뻔하다’는 사실이었다. 삼류 악당도 이렇게 대사를 쓰면 제작자에게 대본으로 뺨을 맞는다고, 그는 이를 갈듯 말한다. 이 장면에서 웃을 수만은 없었던 이유는 우리가 이미 저 문장들을 너무 많이 들어봤기 때문이다. 황동만이 내뱉은 일갈은 단순한 허세나 실없는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존엄을 빼앗긴 인간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마지막 저항이자, ‘진부함’이라는 폭력에 대한 본능적인 분노다.
황동만에게 고양이를 살리기 위해 사채를 쓰고, 그 돈에 치여 파멸해 가는 과정은 온 삶을 던진 피눈물 나는 서사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비극이자, 영혼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다. 그런데 나를 협박하는 악당은 어디 삼류 대본 기계에서 뽑아낸 듯한 진부한 대사들을 읊어댄다. “지인들 피눈물 흘리게 하겠다”, “밤길 조심해라.” 그래서 동만은 분노한다. 이 거지 같은 현실이 삼류 통속극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내 삶이 겨우 그따위 진부한 설정에 무너지는 꼴을 볼 수 없어서, 그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인 ‘감독의 시선’으로 반격한다. “악다구니를 쓰려면 좀 신선하게 하든가!”라는 외침은, 내 고통을 뻔한 공식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흔한 비극의 소모품으로 만들지 말라는 필사적인 인간 존엄의 선언이다.
우리가 진부함에 분노하는 것은 문학이나 영화 속 클리셰가 지루해서가 아니다. 식상하거나 촌스러워서도 아니다. 현실에서의 진부함은 나의 고유한 고통을 흔해 빠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협박하는 말조차 매뉴얼처럼 복제되는 순간, 인간의 절박함은 사라지고 기능만 남는다. 사채업자는 돈을 받아내기 위해 협박하지만, 정작 그 말에는 분노도 창의성도 없다. 그는 마치 이미 입력된 문장을 자동 재생하는 기계 같다.
진부함은 단순히 “촌스러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다. 누군가를 하나의 클리셰로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고유함을 잃어버린다. 황동만이 분노한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돈을 뜯는 사채업자보다, 인간의 고통마저 판에 박힌 대사로 처리해 버리는 세계 자체를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황동만은 20년 동안 시나리오를 붙잡고 살아온 사람이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건 결국 인간을 관찰하는 일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상처를 가지고 있고, 다른 방식으로 무너진다. 그런데 진부한 언어는 그 복잡한 인간을 하나의 틀로 밀어 넣는다. “겁먹어라.” “수치심을 느껴라.” “불안해져라.” 협박조차 정형화된 순간, 인간은 대상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데이터로 전락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슬롯도 황동만이 마주한 사채업자의 전화 통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청년들의 좌절은 ‘노력 부족’이라는 진부한 한마디로 요약되고, 누군가의 실패는 ‘패배자의 서사’라는 뻔한 카테고리에 분류되어 콘텐츠로 소비된다. 타인의 아픔을 깊이 들여다보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틀에 집어넣어 평가해 버리는 세상. 이 ‘진부한’ 세상 속에서 우리의 진짜 고통은 설 자리를 잃고 주변을 맴돈다. 그것은 게으름의 소산이자, 타인의 삶을 고유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폭력이다.
그러니 우리도 황동만처럼 가끔은 악을 써야 한다. “내 인생이 왜 네 맘에 들어야 하는데요?“ 라고 반문해야 한다. 내 삶을 뻔한 공식으로 재단하려는 세상의 모든 진부함을 향해, 내 고통은 너희의 삼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내 삶의 각본은 오직 나만이 새로 써 내려갈 수 있다고 말이다.
“힘 내, 다 잘 될거야” 라는 ‘뻔한 말’ 대신 차라리 침묵하자. 무바카라임한 낙관을 건네기보다 고요히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