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패킹은 뭐가 재밌을까

인천 강화도 함허동천 야영장

by김민수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어느새 싸락눈으로 바뀌었다. 텐트 안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텐트 전실 지퍼를 올렸을 때 플라이에 쌓였던 눈이 와르르 쏟아졌다. 우산을 쓰고 화장실로 내려가는 길이 어두웠다. 길에 발을 내딛을 때마다 들리는 뽀드득 소리에 문득 '플라이에 가이라인을 할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귀찮음을 이기지 못한 덕에 밤새 습기 먹은 침낭을 덮어야 했다.


2025년 12월의 어느 토요일, 첫 백패킹을 가려고 했던 그날의 일기예보는 눈/비 확률 90%를 가리켰다. 보기 드물게 확신에 찬 예보다. 실제로 날은 흐렸고 계속 비가 내렸다. 첫 백패킹의 난이도를 '어려움'으로 선택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후회는 운무로 그윽하게 둘러싸인 강화도 산세를 보고 금세 사라졌다.


함허동천 야영장에는 오후 2시에 도착했다. 비 내리는 야영장은 주말에도 한산했다. 이곳은 강화도에 위치해 수도권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다. 총 4개의 야영장이 있고 그중 2~4 야영장은 입구에서 거리가 좀 있다. 그래서 보통 이곳을 찾는 캠퍼들은 배낭에 모든 짐을 싣는 백패킹 모드로 온다. 나 같은 초보 백패커가 오기 좋은 곳이란 의미다.


허겁지겁 피칭을 완료한 나의 텐트. 데크와 플라이에 물기가 흥건하다.

나는 2야영장 초입의 데크를 오늘의 집터로 정하고 텐트 피칭을 시작했다. 주위에 몇 개의 데크가 더 있었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텐트는 이날을 위해 새로 구입한 것이고 집에서 한번 쳐 본 게 전부였다. 쓰던 우산을 내려두고 그라운드시트 위에 이너텐트를 설치한 뒤 플라이를 씌웠다. 비가 내려 이너텐트가 금방 젖었고 마음이 조급해져서 허둥지둥거렸다. 가이라인까지 할 여력은 없었는데 그 결과는 밤새 눅눅한 실내가 되었다.


어렵사리 피칭을 마치고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비 내리는 날씨였지만 빨빨거리며 움직였더니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몸은 빠르게 식었고 한기가 돌아서 재빨리 우모복으로 갈아입었다.


비가 내려 텐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이른 저녁식사로 냉동 보쌈 수육을 꺼냈다. 해동을 위해 처음 써 본 발열팩은 부글부글 끓다 금방 조용해졌다. 30분을 기다리고 발열팩 하나를 더 쓴 후에야 뜨끈한 보쌈이 완성되었다. 전자레인지라면 2~3분에 안에 끝날 일을 1시간을 기다렸다. 익숙한 문명의 이기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보쌈에 막걸리는 실망시키지 않는 조합이었다. 보쌈 수육에 무김치를 같이 한입 먹고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다 문득 내내 들리던 빗소리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 텐트 한쪽, 소심하게 나 있는 작은 환기창 너머 풍경을 봤더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리던 비는 진눈깨비가 되었다가 본격적인 눈이 되었다.

나는 백패킹은커녕 캠핑도 해본 적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캠핑을 싫어하는 쪽에 속했다. 내가 봐온 것은 오토캠핑이어서 차에 한가득 짐을 싣고 와 텐트를 피칭하고 여타 장비들을 세팅하는 과정이 평일에 이은 노동의 연속으로 보였다. 또 난로, 전기장판, 침대처럼 별장을 짓는 듯한 캠핑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럴 거면 밖으로 나온 의미가 없지 않나 하며.


그런 내가 백패킹을 결심한 것은 몇 년 전에 우연히 접한 설산의 백패킹 영상 때문이다. 새하얀 숲길과 광활한 언덕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풍력 터빈은 일상에서 벗어난 판타지 세계처럼 느껴졌다. 배낭 하나를 메고는 유유히 산을 올라가 텐트를 치고 그곳에서 하루를 지내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이제야 백패킹에 도전하는 것은 어떤 돌파구 또는 피난처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눈은 밤새 내렸다. 식사를 정리하고 침낭에 쏙 들어가 누워서 텐트 천장을 말똥말똥 쳐다보는데 밖에서 스르륵 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이 야밤에 누가 올라와서 텐트를 피칭하는 건가, 아니면 어떤 동물이 다가오는 건가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잠이 들었다. 사실 그 스르륵 소리는 텐트에 쌓이던 눈이 바닥으로 쓸려 내려가는 소리였다. 초보 백패커는 떨어지는 낙엽에도 긴장했다. 물론 이 계절에 떨어질 낙엽은 없지만.


어느새 눈이 그친 하늘은 청명했다.

새소리에 잠을 깬다는 것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반면 그러지 못했던 텐트는 내부 벽면에 결로가 생겨 얼어있었다. 숙취인지 단순한 두통인지 머리가 아파왔다. 달리 할 일도 없어 기계적으로 짐을 배낭에 넣고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파란 하늘을 빼고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첫 백패킹은 상상과 조금 달랐다. 눈비가 와서 더 그랬겠지만 허둥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텐트를 피칭하고 식사를 차리는 모든 과정이 그랬다. 비에 젖은 플라이가 이너텐트와 딱 달라붙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몸소 체득했다. 축축해진 침낭과 맞지 않는 베개 때문에 잠도 계속 설쳤다. 이번 주말은 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사색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순간은 거의 없었다. 내가 매료되었던 그 영상이 현실 세계를 전부 반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침낭 안이 춥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함허동천.

텐트를 철수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테이크아웃 했다. 주차한 차는 밤새 내린 눈으로 유리가 얼어붙어 있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돌아온 월요일, 백패킹은 재밌었냐는 회사 동료의 물음에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어떤 것에 반한다거나 한 번에 흥미를 느끼는 일은 드물어졌다. 애초에 그런 일이 쉽사리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백패킹이 싫어졌다거나 진저리가 칠 정도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패킹을 더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