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기다리는 옷장
계절에 따라 입고 싶은 옷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린넨의 거친 텍스처와 발색이 아름다운 린넨 재킷 혹은 슈트, 가을에는 매끈한 울 소재가 부드럽게 몸에 감기는 니트, 그리고 겨울에는 따뜻함과 투박함이 매력적인 ‘플란넬’이 있습니다.
최근 가을 겨울 옷을 꺼내면서 달라진 취향에 따라 기존의 플란넬 슈트 2벌을 처분했습니다. (달라진 취향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다뤄보기로 할게요.) 비워진 저의 옷장 안에 플란넬 슈트, 특히 그레이 플란넬 슈트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지금 이 시기에 등장한 슈트가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캐시미어 100%
슈트서플라이(Suitsupply)는 늘 추천드리는 브랜드입니다. 가격이 저렴하지 않지만, 소재는 늘 유럽 위주의 고급 소재를 활용하고 잘 구성된 패턴으로 근사한 핏을 만들어 줍니다. 새로운 시즌이 되면 늘 신상품을 살펴보는, 새로움이 기대되는 브랜드입니다. 만약 아직 이번 가을 겨울 상품을 보지 못했다면 추천드립니다.
이번 26FW 슈트서플라이에서는 잔잔하게 털이 올라온 플란넬 소재의 슈트가 발매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레이, 플란넬, 그리고 더블, 심지어 밀라노 핏(영국식 스타일)입니다. 구매를 안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바로 구매를 진행하려는 찰나,
‘캐시미어 100%’
캐시미어 100%라고요? 울 캐시미어 혼방도 아니고 캐시미어 100%라면 꽤 고급 소재입니다. 게다가 슈트서플라이가 사용하는 소재는 단순히 출처를 알 수 없는 소재가 아니라 증명할 수 있는 브랜드 소재를 사용합니다. 제냐, 로로 피아나 같은 것 말입니다. 이번에는 영국의 Bower Roebuck 소재입니다. 단단하면서도 내구성을 고려한 원단으로, 캐시미어 소재이지만 꽤 중심을 잡아주는 소재입니다.
부드럽지만 가볍지 않은 소재
새롭게 만나본 캐시미어 플란넬 더블 그레이 슈트는 그 잔잔함 속에 가진 매력이 있습니다. 잔잔하게 올라온 기모는 캐시미어의 매력을 더 강조해 줍니다. 캐시미어 소재로 표현된 그레이 컬러는 특유의 고급스러운 텍스처가 돋보입니다.
캐시미어라고 하면 흔히 부드럽고 포근한 니트나 머플러를 떠올립니다. 피부에 닿는 부드러움과 가벼움, 그리고 따뜻함이 캐시미어를 대표하는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슈트에 사용된 캐시미어는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니트처럼 흐물거리기보다는 재킷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부드러움을 표현합니다. 특히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 특유의 구조적인 실루엣과 캐시미어 소재가 만나면서 서로 다른 매력을 만들어 냅니다. 단단한 형태와 부드러운 표면이 공존한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이번 슈트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그레이 컬러의 발색입니다. 일반적인 울 소재의 그레이 슈트가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라면, 캐시미어 플란넬의 그레이는 조금 더 깊고 따뜻한 느낌을 줍니다. 표면의 미세한 기모가 빛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면서 컬러를 더욱 차분하게 만들어 줍니다.
와이드 팬츠, 달라진 클래식의 비율
특히 이번 스타일은 최근의 톰 포드를 비롯한 전반적인 남성복 트렌드가 접목되어 팬츠가 매우 와이드하고 길어졌습니다. 한동안 남성복에서 슬림한 실루엣이 정답처럼 여겨졌다면, 이제는 조금 더 여유로운 실루엣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기입니다. 물론 클래식 남성복에서 와이드 팬츠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의 슈트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형태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유행이 바뀌면서 다시 돌아온 셈이죠.
이번 슈트의 팬츠는 단순히 허벅지와 밑단이 넓어진 것 이상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재킷과 팬츠 사이의 비율이 달라지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도 달라집니다.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이 가진 묵직함을 넓은 팬츠가 자연스럽게 받아주면서 한층 안정적인 실루엣을 만들어 줍니다.
특히 와이드 팬츠는 기장이 중요합니다. 지나치게 짧으면 넓어진 실루엣의 매력이 반감되고, 반대로 너무 길면 원단이 발등 위에 과하게 쌓이면서 지저분해 보일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신발 위로 떨어지는 길이를 찾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플란넬 소재가 가진 적당한 무게감은 넓은 팬츠의 실루엣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가볍게 흩날리는 여름 팬츠와 달리 아래로 차분하게 떨어지는 겨울 팬츠의 모습은 겨울 슈트를 입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캐시미어 슈트, 사치에 가까운 선택
캐시미어 100%라는 소재가 마냥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울 슈트와 비교하면 마찰과 반복적인 착용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특히 팬츠처럼 움직임과 마찰이 많은 부분은 더욱 그렇습니다. 좋은 소재라고 해서 반드시 관리가 편하거나 오래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소재일수록 그 특성을 이해하고 입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실용성만 생각한다면 캐시미어 100% 슈트가 꼭 정답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적당한 무게의 울 플란넬 슈트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하고 멋스러운 겨울을 보낼 수 있습니다. 관리도 비교적 수월하고 가격적인 부담도 덜하겠죠.
그렇다면 굳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캐시미어 슈트를 선택할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옷을 구매하는 이유가 언제나 실용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디자인의 옷이라도 소재가 달라지면 느껴지는 만족감이 달라집니다. 남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작은 차이를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진 공통적인 취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캐시미어 슈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입는 횟수만으로 가격을 나누어 생각한다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겨울은 짧고, 슈트를 입을 기회도 과거보다 줄어들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오면 가장 먼저 꺼내 입고 싶은 옷이 있다는 것은 꽤 즐거운 일입니다.
짧은 겨울을 위한 포멀 사치
슈트는 분명 예전보다 일상에서 멀어진 옷입니다.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면 굳이 슈트를 입을 필요가 없는 시대입니다. 더 편하고 실용적인 옷이 많고,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서도 복장의 기준은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슈트를 좋아합니다. 셔츠와 타이를 고르고, 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팬츠의 주름과 구두의 균형을 맞추는 과정이 좋습니다. 옷을 입는 데 조금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 불편함보다는 즐거움에 가깝습니다.
캐시미어 슈트는 이런 즐거움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옷입니다.
캐시미어 100% 슈트가 꼭 필요한 옷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훌륭한 울 플란넬 슈트가 많고, 조금 더 합리적인 선택지도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모든 소비가 필요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선택이 있습니다. 점점 짧아지는 겨울이 아쉽지만, 그만큼 겨울에 입고 싶은 옷은 더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올겨울에는 이 그레이 캐시미어 슈트를 조금 더 자주 꺼내 입어볼 생각입니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에도 말입니다.
어쩌면 캐시미어 슈트라는 포멀 사치는 값비싼 소재를 소유하는 것보다, 굳이 슈트를 입지 않아도 되는 날에 슈트를 꺼내 입는 즐거움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치라면, 저는 조금 더 즐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