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리스 버킷리스트

by이건해

위스키를 좋아하시는지? 나는 무척 좋아한다. 애초에 도수 말고 맛에는 별로 민감하지 않아서 딱 40도의 위스키라면 대체로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데, 놀랍게도 위스키가 참으로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제사 지내러 갔다가 큰집에 쌓여 있던 위스키를 두어 잔 마신 게 계기였을 것이다. 아마 임페리얼 어쩌고였던 것 같다. 좋은 술이다. 그런데 지금도 큰집에는 마실 사람 없는 위스키 선물이 한 병 두 병 쌓이고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에게 쌓이는 거라곤 기껏해야 다이어리와 달력 정도니까.


아무튼 못되게도 그렇게 비싼 술에 맛을 들인 이후로 종종 기회가 될 때마다 위스키를 사서 서랍 속에 쟁여두고 1온스씩 마시곤 한다. 가장 최근에 산 위스키는 7월 26일에 산 조니워커 레드였다. 조니워커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레드라벨이 국내 마트에서도 유통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두어 달에 한 병씩 사도 좋을 이 녀석을 다 마신 것은 8월이나 9월이 아닌 바로 12월인 이번 달이었다. 아껴서 조금씩 마시다가 마지막 한 잔을 남겨두고 "마지막 한 잔은 영광의 순간이 오면 마셔야지"하고 봉인했던 것이다. 미드 "배틀스타 갤럭티카"를 보면 로봇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어 물자 공급이 끊기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막막한 여행과 치열한 전투를 반복하는 가운데, 술고래인 부함장이 마지막 위스키 한 병에 눈금을 그어가며 술을 아끼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과 비슷한 꼴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한 잔을 비운 그 날이 영광의 순간이 온 날이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예고되었던 고통을 확인했고, 그리고 살짝 취하고 싶었는데 손 닿는 곳에 있는 술이 그것 뿐이라 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맛은 있었다.


요즘 들어서 그런 일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요리 레시피도 저장하고 멋진 카페도 저장하고 기가 막힌 맛집도 저장하고 여행 정보도 저장하고 읽고 싶은 바카라, 보고 싶은 영화, 하고 싶은 게임도 저장하면서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당장 이 리스트를 해치워야지' 하고 입맛을 다시는데, 정작 그렇게 리스트를 주루룩 해치울 정도로 여유로운 순간은 도무지 다가오질 않아서 리스트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지는 것이다.


읽고 싶은 바카라만 369권, 보고 싶은 영화는 317편.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이 리스트를 열심히 작성하는 한 평생 걸려도 이것들을 모두 해치울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실현 속도보다 욕망이 쌓이는 속도가 빠른 것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원히 눈이 내리는 나라에서 제설 작업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pencil-1891732_1280.jpg좋아하는 것의 리스트도 만들다 보면 일이 되곤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버킷리스트의 작성 빈도를 크게 낮추고, 정말 까먹었다간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만한 정보만 모아두고, 영화도 바카라도 일주일에 하나씩 처리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언젠가' 찾아올 거대한 기쁨 따위를 기대하고 살아봤자 딱히 좋을 일도 없다는 걸 2016년이 증명했던 것이다. 기약 없는 행복 따위는 잊어버리고 소박할지언정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편이 훨씬 낫다. 당연히 돈은 좀 덜 모이겠지만, 거북이처럼 숨도 안 쉬고 달려서 지쳐버리는 것보다는 토끼처럼 그럭저럭 농땡이치고 사는 편이 정신적으로 유익한 것이다. 토끼가 거북이보다 좀 늦었다고 산 채로 간을 뽑히는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니까.


물론 마음을 그렇게 고쳐먹었다고 깜짝 놀랄 만큼 생활이 변하고 매일매일이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나도 ‘거북이처럼 도전하고 토끼처럼 즐겨라' 같은 바카라을 써서 한몫 단단히 잡았겠지. 단순히 미뤄두기를 그만두고 장바구니에서 썩는 물건을 줄였을 뿐이다. 덕분에 더 바빠졌고, 바로 사 버리는 물건도, 못 본 척 하는 물건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렇게 보류, 저장 프로세스를 줄이는 것만으로 삶이 좀더 단순해지고 어깨도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게 이렇게 많은데 현실은 이 모양이라니!'하고 쓸데없이 억울해 할 일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전에 없이 새해의 다짐을 적어보자면, '버킷 리스트를 줄일 것'이다. 원하는 게 있고 2주일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바로 달성할 것. 아니면 그냥 별 가망 없다고 간주하고 아예 잊어버릴 것. 적어도 그 욕망을 형체로 남기지 말 것.


그러니 조만간 마트에 찾아가서 조니워커 레드를 또 한 병 사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를 위해 남기는 축배 따위는 필요없다.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것보다는 느긋하게 안락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위스키나 마시는 편이 멋지지 않은가?



-후기


고등학생 때 수학이 약해서 오답노트를 꽤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양이 많아져서 결국은 한 번도 제대로 복습하지 못하고 수능을 쳤죠. 그냥 그 시간에 영화나 보는 건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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