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을 한 신부님>
절도, 폭력, 마약, 범죄로 얼룩진 인생이지만 다니엘은 소년원에서 만난 토마시 신부를 보며 진짜 신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다. 그러나 범죄의 낙인은 지워지지 않는다. 토마시 덕에 가석방되어 목공소에서 일할 기회를 얻지만, 토마시는 다니엘에게 "신부는 절대 될 수 없을 것"이라며 "어떤 신학교도 범죄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목공소에 도착했지만, 도저히 일할 마음이 나지 않는 다니엘은 동네의 성당에 향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실 신부였다고, 몰래 훔친 토마시의 사제복을 보여주며 거짓말한다. 하필 그 시기 마을의 주임신부는 알코올 중독 치료로 자리를 비우면서 다니엘의 신부 행세가 시작된다.
다니엘은 교리를 등에 없고 권위적으로 설교하지 않는다. 본인이 몸소 겪은 죄와 상처와 아픔을 중심에 두고 주민들에게 다가간다. 아이가 담배를 피워 손찌검을 했다고 고해성사를 하는 엄마에게, 대신 아이 자전거를 태워주는 벌을 받으라고 말하는 식이다. 형식 따위는 내려놓고 진심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면 된다고 말하는 다니엘에게 마을 사람들은 점점 빠져들어 간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모두가 쉬쉬하는 아픔이 있다. 7명의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 이후 마을은 집단적 트라우마와 증오에 갇혀 있다. 죽은 사람은 7명이지만 추모 장소에는 6명의 사진만 놓여 있다. 한 사람의 운전자를 가해자로 낙인찍고 마을 사람들은 그의 장례마저 거부하고 있었다. 주민들에게 스와베크는 술에 취해 아이들을 죽인 악마였고, 아이들은 아무 잘못 없이 희생된 피해자였다. 주민들은 이 단순한 구도 위에서만 사고하며 스와베크의 아내까지 괴롭힌다. 날카로운 증오가 가득 담긴 편지를 보내고, 집에 살인자의 아내라고 낙서를 하는 식이다.
한없이 고통스럽게만 보이던 유가족들의 얼굴에서 다니엘은 증오와 폭력을 본다. 다니엘은 다수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와베크의 장례를 치르려 한다. 복잡한 문제는 한 사람의 가해자를 상정하면 간단해진다. 이 간단한 해답의 유혹에 휘말린 마을 사람 대다수는 다니엘의 뜻에 반대한다. 심지어는 집에 불을 지르며 거칠게 저항하지만, 사고 당일 술에 취해 있던 사람이 스와베크가 아니라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니엘은 더욱 뜻을 굽힐 수 없다. 다니엘은 그 사실을 폭로하지 않는다. 다만 스와베크의 장례를 마을 안에서 치러줄 뿐이다. 몇 사람은 장례 대열에 합류하고, 몇 사람은 저 멀리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마을엔 화해의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뒤 다니엘의 소식을 알게 된 토마시 신부는 마을로 다니엘을 찾아온다. 그는 다니엘을 다시 소년원으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다. 다니엘은 토마시 신부를 따돌리고 마지막 미사를 치러낸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성당에서 다니엘은 사제복을 벗는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가 얼룩져 새겨진, 문신이 가득한 몸을 보여준다. 이후 마을은 공동체적 화해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스와베크의 아내도 성당에 나와 마을 사람들과 미사에 참여한다. 그러나 소년원으로 돌아간 다니엘의 처지는 참혹하다. 자신이 의도치 않게 살해했던 사람의 가족이 소년원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영화는 그와의 싸움 이후 피투성이가 된 다니엘의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우리는 <문신을 한 신부님>을 두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하나는 종교란 무엇인가, 둘은 우리가 이루어 놓은 슬롯란 무엇인가 하는 차원에서다. '성(聖)'이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 종교적 본질을 의미한다. 신 그 자체, 은총, 사랑, 용서 같은 것들이다. 이는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인간은 '성물(聖物)'을 통해 '성(聖)'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교회, 십자가, 성당, 성경, 신부 등의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성물은 성(聖)을 향하도록 돕는 매개체이지, 그 자체가 성(聖)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인간이 때때로 그 매개체를 본질과 혼동한다는 데 있다.
다니엘은 성물을 훔친다. 토마시의 사제복을 입고 신부 행세를 한다. 그저 형식적이었던 미사를 진심이 가득한 본질적 시간으로 탈바꿈시킴은 물론,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무한한 사랑을 상징하는 ‘용서’를 마을 사람들이 직접 행하도록 돕는다. 마을 사람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 서로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자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가짜 신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진짜 '성(聖)'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다니엘이 일군 '성(聖)'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교회 시스템은 그를 허락하지 않는다. 문신은 다니엘이 죄로 얼룩진 ‘속(俗)’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상징한다.
제도는 다니엘이 이룬 공동체의 변화를 가치 판단의 기준에 편입하지 않는다. 그저 전과자라는 신분과 정해진 규율을 기준으로 그를 다시 과거의 자리로 돌려보낸다. 다니엘을 쫓아 마을로 향했던 토마시는 그간 다니엘이 신부 행세를 꽤나 잘했음을 증명하는 광경을 마주한다. 마을 사람들과 찍은 사진, 다니엘에게 보내온 편지 등. 토마시는 다니엘의 변화를 보지 못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했다는 사실과 그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토마시 개인의 선의는 제도의 규칙을 넘어설 수 없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선의를 가진 사람마저 자신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제도의 한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행위가 불가역적이라고 보았다. 한 번 저지른 행위는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없고, 그 결과 또한 행위자의 의도대로 통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과거의 행위에 영원히 붙잡힐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 아렌트가 용서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렌트에게 용서는 과거의 행위를 없던 일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과거의 행위가 행위자를 영원히 규정하지 못하도록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여는 행위다.
마을 사람들의 과거의 비극적 사고는, 그들의 미래를 더 이상 독점하지 못한다. 그 사고 이전으로 완벽히 돌아갈 수야 없겠지만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정작 소년원으로 송환된 다니엘 본인의 죄는 사해 지지 않는다. 슬롯는 다니엘이 마을에서 만들어낸 변화를 그의 새로운 삶을 위한 근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정해진 대로 규율을 어긴 다니엘을 다시 소년원으로 송환한다. 교화를 목적으로 지어진 소년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다니엘은 다시 폭력의 연쇄와 마주한다. 자신이 과거에 죽게 만든 사람의 형 보너스가 복수를 위해 그를 공격하고, 다니엘 역시 끝내 폭력으로 응한다. 그는 자신이 마을에서 끊어내려 했던 증오의 연쇄를 자신의 삶에서는 아직 끊어내지 못한다.
영화가 끝내 보여주는 것은 용서의 실패가 아니다. 한 사람의 변화만으로는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달라지는 것과, 그 달라짐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공동체가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