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했을까>
고장 난 가전제품이나 딱 떨어지는 수학 공식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차분히 원인을 분석하다 보면 명쾌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 해답이 존재한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문제적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대다수의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 삶의 어느 국면에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설 수 없게 된다. 그것을 이해하려고 들여다보는 순간에도 나의 판단 기준은 감정에 의해 수도 없이 흔들리며 이미 내 존재 자체가 그것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를 '문제(problem)'와 '신비(mystery)' 개념으로 정리했다. 세상에는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문제'도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나 삶의 비극처럼 내가 감히 바깥에 서서 함부로 판단하거나 제삼자처럼 해결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접근은 주체를 대상화한다. 나는 정상이고 저것은 결함이 있으며 나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저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려 주겠다는 태도다. 마르셀은 당연히 이러한 해결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인간의 삶과 관계에 관한 많은 문제는 신비의 영역에 있으며 그것을 문제로 상정하고 해결하려는 태도보다는 신비를 있는 그대로 함께 견뎌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의대 진학 후 조현병이 발병한 누나 후지노 마사코와, 병을 인정하지 않은 채 딸을 25년간 집안에 가둔 의사 부모, 그리고 이 비극을 카메라로 기록한 남동생 후지노 토모아키 감독의 실화 다큐멘터리다. 부모의 치료 거부로 수십 년간 방치되었던 마사코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뒤늦게 입원 치료를 받게 되고, 20여 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3개월 만에 상태가 크게 호전된다. 그러나 곧 폐암이 발병해 치료 후 삶을 얼마간 누리다 죽음을 맞이한다. 후지노 감독은 누나의 죽음 이후, 영화 개봉에 대한 허락을 받고자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묻는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어떻게든 부모를 설득해서 병원에 보냈어야지." 마르셀이 지적하듯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안에서 후지노 가족은 물화되어 버린다. 누구의 실바카라인가, 누구의 망설임인가, 누구의 무지함인가. 그 탓을 묻는 순간 관객은 저들보다 압도적으로 더 나은 사람임을 증명해야 하는 바카라임을 떠안는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가족은 신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집단이다. 조금만 어떻게 하면 내 뜻대로 바로 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미꾸라지처럼 영원히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존재다. 쉬이 '나'와 동일시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내 삶에서 가장 강력한 타자성을 뿜어내는 존재다. 그들을 무어라 판단하는 순간, 그 판단의 잣대에서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본도 일본이지만, 우리 슬롯의 가족 문화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실패했다고 보지는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이 야속하다. 심지어는 어머니를 탓하는 후속 발언은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가족 중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면죄부를 주는 것도 아니고 뻔하디 뻔한 상대주의를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지긋지긋한 이유는 우리가 겪고 있는 그 삶의 모습과 저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내가 저 상황에 처했다면 달랐을 것이라는 가정보다, 우리는 특정한 조건 안에서 얼마나 주저할 수 있고 얼마나 그릇된 선택을 내릴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낫다.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을 넘어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우리는 인간을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결하려는 태도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인간의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조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상황에 대한 공감과 더 깊은 층위에서의 소통이 필요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보다 신비를 견디는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지라도 저들 중 누구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가정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삶의 신비 안에서 허둥대는 인간은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 속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나도 저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훨씬 자연스러운 이유다. 영화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답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다시 그들을 대상으로 돌려놓지만, 질문을 끝까지 붙드는 순간 그 질문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부모에 대한 고발 같지만, 동시에 무력한 자신에 대한 반성문 같기도 하다. 그 덕에 우리는 판단하는 타자가 아닌 함께하는 주체가 될 여지를 꿈꾼다. 두 세대의 인생을 걸친 긴 시간을 한 편의 영화로 담은 이유는 이것으로도 차고 넘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