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를 모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성난 사람들 2>,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byMay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멀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中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사람은 자신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비좁은 프레임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그리 선명하지 못하다. 다시 멀어지는 것이 꽃인지 나인지, 다가오는 것이 나인지 바람인지도 인식하지 못한다. 끝내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프레임 밖에서 다른 프레임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누군가의 세상은 물론 이해하지 못한다.


삶이란 단어는 고매하고, 생존이란 단어는 굴욕적이다. 믿기 힘든 거짓말 같지만 우리 대부분은 삶보단 생존이라는 굴레 안에서 살아간다. <성난 사람들 2 >는 그런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다. 굴욕적이고, 어딘가 찜찜하고, 다소 억울하다. 삶이었다면 당연히 챙겨가야 할 몇 가지 조건들은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사치스러워진다. 생존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만큼 결정적이진 않지만 거추장스러운 생채기 같은 상처들. 하나하나 치료하고 가자니 그 상처를 돌아볼 시간이 내 생존을 위협하는 듯하다.


<성난 사람들 2>를 거칠게 요약한다. 같은 컨트리클럽에서 일하는 두 커플이 있다. 총지배인 조시와 그의 아내 린지, 시간제 직원 애슐리와 그의 약혼남 오스틴.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회원들이 골프를 치고 파티를 여는, 웃는 얼굴이 곧 업무인 그런 곳이다. 조시와 린지는 회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지만 그들의 씀씀이를 따라가느라 매달 쫓기며 살아간다. 벅찬 일상 속에서 관계는 악화되고 각방을 쓴 지도 오래다.


애슐리와 오스틴은 컨트리클럽의 화려함 속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계속해서 발견한다. 애슐리는 말단 계약직 직원으로서 수모를 감당하고, 오스틴은 대학 시절 운동선수로서 화려했던 과거를 계속해서 회상하며 보잘것없는 작금의 현실을 애써 부정한다. 어느 밤 조시와 린지가 집기를 던지고 골프채를 휘두르며 싸우는 장면을, 오스틴과 애슐리가 우연히 촬영한다. 그날부터 네 사람은 어느 쪽도 이길 수 없는 협박전에 들어선다. 고통스럽지만 영광스러운 총지배인 커플의 지위를 유지하려 영상을 지우려는 쪽과, 가진 것은 영상뿐인지라 이 기회로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를 역전시키려는 쪽의 싸움이다.


조시는 직원들을 모아놓고 일장 그럴듯한 연설을 하고, 잘생긴 외모와 재력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삶도 생존의 연속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나, 일개 피고용인일 뿐이다. 언제 이 삶이 끝나버릴까 전전긍긍하면서도, 본래의 꿈은 여기가 아닌 저 편에 있다.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알진 못한다. 더없이 취약한 인간이다.


그에게도 상처가 많다. 원가족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사랑하는 아내 린지와의 관계, 위로는 고용주와 VIP 손님들에겐 머리를 숙이고, 아래로는 직원들에게 겉보기엔 나이스한 상사가 되려 모든 말을 돌리고 돌린다. 아주 작은 결핍과 상처들을 외면해 온 시간에 대한 대가는 크다. 상처는 질척이고 끈적거린다. 그렇기에 숨 가쁘게 살아가던 어느 날, 한데 덩어리 진 채 길목을 막아서 버린다. 타인들과의 관계가 뒤엉킨, 그리고 왜곡된 욕망이 불을 붙인 몇 가지 실수들은 그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만다.


아내 린지 역시 다르지 않다. 완벽한 부부, 안정된 외양이라는 겉치레를 유지하려 애쓰지만 쉽지가 않다. 여러 메신저를 들락날락 거리며 구애하는 남성들을 뒤적거리는 일은 다른 것보다 젊은 날의 비교적 완벽했던 자신에 대한 갈망이다. 린지는 조시에게 불만이 많다. 총지배인으로서 숨 가쁜 삶을 살아가는 조시는 가정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 조시는 유튜브에서 자기 계발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세상의 꼭대기에 어떻게든 기어오르려 애쓴다. 린지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쪽 길도 저쪽 길도 선택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것이다. 남편에 대한 불만은 사실 스스로에 삶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다.


오스틴과 애슐리도 마찬가지. 둘은 일종의 가정 폭력의 피해자다. 오스틴은 부모의 물리적 폭력 속에서 자랐고, 애슐리는 부모의 방임과 무관심 속에서 자랐다. 둘은 버림받을까 두려워 스스로의 진심을 숨기고 마는 어딘가 고장 난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둘은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한다. 이 분노는 정당해 보이는 듯 하지만 결국 우리도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이 있다는 자기중심적 욕망에 불과하다.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내 그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조시와 린지의 실바카라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그러나 어디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이는 준비되지 않은 부모의 그릇된 돌봄과, 인정 투쟁의 구렁텅이로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세상 속에서 나름의 생존 방식을 찾으려 애쓴 결과일 뿐이다.


두 커플이 서로의 자리를 위해 발버둥 치는 세상, 권력의 꼭대기에는 박 회장이 군림하고 있다. 그녀는 컨트리클럽의 실 소유주다. 그녀는 딱히 네 사람의 생존에는 관심이 없다. 자금 세탁을 위해 컨트리클럽을 이용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마치 빈틈없이 완벽한 절대 악 같지만 그녀 스스로의 생존도 만만치는 않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도구로 생각한다. 비즈니스가 되지 못하면 가족도 친구도 없다. 세상에 치열하게 맞선 뒤 자신의 결함을 가리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낸 굳건한 성벽이다. 그녀 스스로 만든 성 안에서 그녀는 이제 어떤 사람과도 사람대 사람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듯, 사람이 없는 세상에선 더 이상 나도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생존은 요컨대 삶이라는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들은 본래 서로를 망가뜨리려는 목적으로 살아가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자신의 한계 속에서 생존하려 애쓴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선택한, 자신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 가능한 행동들은 서로의 삶에 생채기를 만든다. 신형철은『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썼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을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 연민하고, 타인을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라 판단해 버린다. 이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더욱 커다란 오해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어 버리게 된다. 무고한 피해자로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은, 어떤 순간엔 분명 유효하지만, 어느 순간엔 자신을 멈춰버린 바로 그곳에 영영 고정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세상은 그렇게 주고받은 상처를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고 치료받지 못한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정확히는 스스로에겐 잘못이 없다 착각하면서도, 서로의 생존에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어 내는 공범이 되어 버린다. 더 넓게 보자면 우리는 서로에게 억울해하지만, 우리에겐 서로에 대한 바카라임이 있다. 희망은 없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정말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서로에 대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상처를 품고 있고, 앞으로도 크고 작은 상처들을 마주하며 살아갈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조시는 부부싸움 영상을 삭제하려는 요량으로 오스틴을 집으로 초대한다. 약을 하자고 제안하며, 오스틴이 취해버린 사이 영상을 지우려던 것이다. 그러나 되려 본인이 먼저 취해버리고 만다. 약에 취해버린 조시는 그동안 외면해 왔던 깊은 무의식을 마주한다. 그가 무의식을 통해 깨달은 것은, 고작 한 번의 실수를 바로잡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조시는 오스틴에게 고백한다. 저 건너에 사랑이 있는 줄 알면서도 자신은 같은 실수를 반복해 왔다고. 그래서 삶이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이 삶이 아닌 생존인 줄도 모르고 망가져버렸다고.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사라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이제니『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中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시는 저 건너에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사랑인지 증오인지 파멸인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이 내가 바라는 대로 존재하길 바라며 두려움과 혼란 속에 살아갈 뿐이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지만, 사이드 미러로 바라보는 세상은 왜곡되어 있다. 사고를 내지 않으려 살피지만 애초에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만의 눈과 입술을 갖고 있기에, 스스로의 억울함을 토로해 보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와중에 누구의 억울함에도 손을 들어줄 수 없다. 그렇기에 희망은 분명히 존재함에도 희미하다. 닿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닿을 수 없다. 억울함을 토로하는 주절거림은 그렇게 공중으로 흩어진다.


고로 우린 영영 아프고, 영영 슬픈 존재다. 시인은 '우리'를 '나'로 한정할 수 있었을 테고, '영영'을 '당분간'이라 적으며 주저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러지 않았다. 따분한 위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에 대한 직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문제를 일으킨 공범으로서 함께 아파하고 슬퍼할 것이다. 모호하기만 한 세상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들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이어 나는 이렇게 적는다. 우리는 그 아픔과 슬픔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그렇기에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로에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으리라고. 끝내 닿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삶을 바카라임지기 위해 다시 발버둥 쳐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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