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위해 폭발하는 판타지 한꼬집

후지모토 타츠키 <안녕 에리>

byMay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붙는 누군가의 행동이 유난히 큰 감흥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 전반에 놓인 부조리를 모른 채 앞으로 나아가는 일보다, 그것을 이미 알고도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많은 행위는 ‘그래서’라는 말 뒤에 따라붙는다. 세계의 압박에 밀려서, 우연과 슬롯적 관계에 얽혀서, 어쩔 수 없이 선택되는 일들이 삶에는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런 보장도 없는 자리에서, 세계가 끝내 내 뜻을 받아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어떤 형식과 태도를 택하는 순간은 유난히 강한 빛을 띤다. 『안녕, 에리』는 바로 그 드문 순간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죽음과 상실을 통과하며 영화를 만드는 유타의 변화를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녕, 에리』 속에는 총 세 편의 영화가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 영화는 유타의 가족으로부터 시작된다. 유타는 시한부 어머니의 모습을 영화로 담는다. 영상으로만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이면은 그렇지 않다. 방송국 PD였던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다큐멘터리로 담아 재기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영상을 찍는 유타를 끊임없이 구박하고 학대한다.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유타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영화에 담지 못하고, 병원이 폭발하는 장면으로 죽음을 대체한다. 그것은 창조적 연출임과 동시에 도피적 판타지이기도 하다.


첫 번째 영화에는 어머니의 죽음과 폭력이 양가적으로 얽혀 있다. 어머니의 강요로 인해 영화를 찍어야만 했던 유타는, 그 안에서도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어머니를 담아내려 애쓴다. 학대를 일삼는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그녀의 죽음은 어린 유타에게 커다란 상처일 수밖에 없다. 유타는 그래서인지 판타지로 영화를 마무리하고,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라는 익살스러운 이름을 붙여 고통을 상쇄한다.


유타는 이 영화를 학교에서 상영한다. 스스로 제작한 첫 영화다. 그러나 어머니가 누워 있던 병원을 폭파하는 비현실적 결말로 인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난을 쏟아낸다. 유타에게는 절실한 기록이었으나, 타인에게는 조롱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이는 현실을 감당할 언어를 아직 갖지 못한 어린 창작자의 좌절이다. 유타는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큰 절망을 맛본다.


두 번째 영화는 에리와 함께 시작된다. 에리는 유타의 첫 영화를 보고 비난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영화 애호가인 에리는 아직 미숙한 유타에게 수많은 영화를 보여주고, 시나리오 작법을 가르치며 특훈을 시킨다. 유타는 에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제작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리 역시 투병 중이며 곧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번째 상실이다. 유타는 굴하지 않고 에리를 흡혈귀 캐릭터로 설정하여 영화를 끝까지 만들어낸다. 어머니의 영화와는 달리, 이번에는 에리의 마지막 모습까지 영화에 담아낸다.


이번 상영의 반응은 첫 영화와 사뭇 다르다. 학생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의 에리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고 말한다. 도피적 판타지로 질타를 받았던 초보 창작자는, 이제 보는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영화적 문법을 획득한다. 이는 에리와의 특훈의 결과이기도 하다. 유타는 비로소 영화를 이해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에리와 함께 만들어진 영화이며, 유타 혼자만의 언어로 완결된 형식은 아니다. 대중을 감동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홀로 감당해 낸 상실의 형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세 번째 영화는 중년이 된 유타에게서 시작된다. 성인이 된 유타는 대단한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소박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가족 모두를 잃게 된다. 망연자실한 유타는 다시 한번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에리와 함께 영화를 감상하곤 했던 폐공장을 찾는다. 그 폐공장에는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에리가 태연하게 영화를 감상하고 있다.


에리는 자신이 실제로 흡혈귀라고 말한다. 다만 정해진 주기마다 모든 기억을 잃고 육체만 다시 깨어난다는 것이다. 에리는 유타에게 그의 영화가 자신의 과거, 그리고 유타를 기억하게 해준다고 말하며 영화가 지닌 의미를 설명한다. 그러나 완전한 호평만을 내놓지는 않는다. 에리는 무언가 ‘한 꼬집’이 부족하다는 말을 남긴다. 유타는 에리를 남겨두고 폐공장을 떠난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에리와 찍었던 그 영화를 계속해서 다시 편집하고 싶어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유타가 공장에서 멀찍이 떨어지자, 공장은 거대한 불길로 뒤덮이며 폭발한다. 부족했던 판타지 한 꼬집이 마지막에 덧붙여지며, 비로소 세 번째 영화가 완성된다.


세상은 부조리하다. 악하고 비열하다는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대와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처로부터 도피하고자 판타지 한 꼬집을 집어넣어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누군가는 그것을 조롱한다. 관객의 인정을 받아내고자 대중적으로 납득 가능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렇다면 첫 번째 영화와 두 번째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 번째 영화는 상실의 아픔을 잊기 위해 만들어낸 영화다. 어머니의 죽음도 학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자신에게 밀려드는 압박에 대한 반작용으로 토해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영화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지만, 어디까지나 대중이 선호하는 문법 안에 놓인 영화이기도 하다. 둘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기보다는, 뒤늦게 돌아보면 ‘그래서 그랬다’고 이해할 수 있는 영화들이다.


세 번째 영화는 조금 다르다. 수많은 상실을 몸소 겪어낸 한 인간이, 세상은 결코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도, 다시금 판타지 한 꼬집이라는 결말로 자신의 영화를 과감히 닫아버리는 것이다. 여러 이유로 영화를 만들었던 유타가 마침내 온전히 자신을 위한 영화를 완성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컨대 첫 번째 영화가 상실을 견디지 못한 도피라면, 두 번째 영화는 상실을 납득 가능한 형식으로 바꾼 작은 성취이고, 세 번째 영화는 현실을 알고도 자기만의 허구를 선택하는 실존적 태도이다.


에리는 정말 흡혈귀일까. 그러나 만화를 다 읽고 나면, 그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안녕, 에리』가 끝내 묻는 것은 무엇이 사실이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허구가 한 인간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가에 가깝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영화와 현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듯, 우리의 삶 역시 진실과 사실, 그리고 허구가 뒤섞인 복합체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보다 진실에 의해, 진실보다도 때로는 허구에 의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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