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에 다다르며 깨달은 '나이 먹어감'과 호칭에 담긴 세월의 무게
어느덧 60대의 한가운데에 들어서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니, 자주 입에 올리는 말 중 하나가 "늙어간다" 혹은 "나이를 먹어간다"이다. 그와 함께 따라오는 호칭 역시 참 애매모호하다. 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그 경계를 뛰어넘은 것 같고, 때론 '중장년'이라 스스로를 칭해보지만 청년이나 중년처럼 가슴에 딱 와닿는 맛은 없다. 일상에서 쓰기에는 어딘가 어정쩡하고 실질적인 의미도 모호하게 느껴진다.
자녀들이 출가해 아이를 낳으면 자연스레 '할아버지'라는 칭호가 생겨난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불리는 할아버지는 여전히 낯설다. 아직 직접 나를 할아버지라 불러주는 손주가 없어서 더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낯선 호칭에 차츰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담담히 인정하게 된다.
얼마 전 아내가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 말끝에 "우리도 이제 늙었다" 했더니, 그 친구가 정색을 하더니 앞으로는 '늙었다' 대신 '나이를 먹어간다'라고 쓰자고 했다. 사실 같은 뜻일지 몰라도 우리말은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이다. 말 한마디의 표현에 따라 마음에 전해지는 느낌이 확연히 달라진다.
'늙었다'라고 하면 왠지 처량해지고, 더 이상 푸를 수 없는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른 느낌이 든다. 반면 '나이를 먹어간다'는 표현은 순번이나 남녀노소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세월을 함께 맞이하고 있다는 동질감을 준다. 아내 친구의 정정에는 늙어가는 쓸쓸함을 조금이나마 완화해보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길거리나 낯선 장소에서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만날 때, 타인은 나를 '아저씨'라 부른다. 결혼 전에는 '총각'이나 '저기요'였고, 결혼 후 30대에 들어서며 처음 '아저씨'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괜히 섭섭하고 늙은이 취급을 받은 것 같아 못마땅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자신의 나이에 걸맞은 호칭을 거부하고 싶었던 철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환갑을 넘긴 지금 누군가 나를 '아저씨'라고 불러주면, 오히려 젊게 봐주는 것 같아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진다.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참 반가운 호칭이다.
은행이나 마트에 가면 '고객님', 혹은 격식을 차려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렇게 불러주면 호칭을 받는 쪽보다 오히려 불러주는 이의 인품이 더 빛나 보인다. 설령 겉모습은 할아버지나 할머니로 보일지라도, 서로를 높여주는 다정한 호칭이 사람의 마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감정이다.
때로는 '아버님'이라는 호칭도 찾아온다. 식당이나 서비스 현장에서 젊은이들이 연배가 높은 손님을 친근하게 응대할 때 쓰는 말이다. 할아버지보다는 소화하기 쉽지만, 이 역시 거의 할아버지의 경계선에 다다랐음을 상기시키는 호칭이라 약간의 묘한 쓸쓸함이 남는다.
해외에 살다 보니 한인 마트나 한인 식당이 아니고서야 한국어 호칭에 민감해질 일이 자주 없다. 하지만 가끔 한인들을 만날 때면 들을 때마다 어색한 호칭과 마주하곤 한다. 몇 년 전 온라인 게임에서 일할 당시, 업무 차 건물 부속 데이케어센터 교실에 들어갈 일이 있었는데 서너 살 남짓한 한국 아이들이 나를 보고 천진난만하게 "아저씨!" 하고 부른 적이 있다.
그 아이들에게도 집에는 할아버지가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 눈에는 할아버지가 아닌 아저씨로 보였나 보다. 아이들의 눈은 거짓이 없고 정직하다. 어린아이의 정직한 눈에 아직은 할아버지가 아닌 '아저씨'로 보였다는 사실에, '나 아직 괜찮나 보다' 하는 착각 아닌 착각을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하지만 비켜갈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조만간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거슬러 올라와 마침내 마주하게 될 영혼의 호칭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저씨라 불리고 싶고 중년의 테두리에 머물고 싶은 간절함은, 나이를 먹어가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쳐 가는 마음의 성장통이다.
누군가 내 나이를 실제보다 젊게 봐줄 때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진심 어린 눈으로 본 그대로를 말해준 것일 수도 있지만, 요즘은 그저 기분 좋으라고 낮추어 말해준 것은 아닌지 슬그머니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이를 먹어가는 것보다 '늙어간다'는 현실이 한층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마음을 다잡게 하는 위로의 주문이 있다. "세월이 가면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다. 이 말은 듣는 이에게도 위로가 되지만, 말을 건네는 이 역시 언젠가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동격의 메시지를 품고 있다.
어느덧 자식이 30대 중반 나이에 이르렀다. 품 안의 아이로만 여겨지던 자식이 이제 중년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바라볼 때, 비로소 부모와 자식이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는 표현의 깊이를 실감하게 된다. 나이 듦에는 한계나 정답이 없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가는가, 늙어가는가 하는 표현과 호칭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매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듯, 세월이 이끄는 대로 유유자적 흘러가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스스로를 가장 젊고 건강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진짜 비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