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 아파트에 이사 온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방 한 칸을 마련하겠다고 아등바등 애쓰고, 결국 빚까지 지고서야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갓 입주한 아파트는 화단에 심긴 나무도, 공원의 잔디도 어딘가 모형처럼 어색했다. 사람은 가득한데 정작 이 공간에 뿌리내린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입주 2년 지난 어느 늦여름 저녁,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낯선 소리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귀뚜라미 소리였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했지만, 곧 궁금해졌다. 도대체 저 많은 풀벌레들은 어디서부터 이 아파트까지 왔을까. 민들레 씨앗도 아니고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작은 생명들이, 낯선 콘크리트 단지를 뚫고 여기까지 스며든 것이다.
신기하게도 나무는 어느새 그늘을 드리울 만큼 자라 있었고, 잔디는 발밑에서 폭신하게 밟혔다. 어디선가 날아온 새들이 가지에 앉아 울었고, 풀벌레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밤마다 합창을 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오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찾아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서로 방 한 칸을 놓고 다투는 기색이 없었다. 매미가 울던 자리에 귀뚜라미가 앉고, 나무 위에는 새가, 흙 속에는 지렁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낯섦은 있었지만 배척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슬퍼졌다. 우리는 방 한 칸을 두고 얼마나 자주 서로를 밀어냈던가.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을 가르고, 익숙한 얼굴과 낯선 얼굴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금을 긋는다. 내 영역으로 이주해 온 이들에게 우리는 종종 "여기에는 네 자리가 없다"라고 말한다. 풀벌레만도 못한 옹졸함이다. 정작 이 땅에 처음부터 뿌리내린 인간은 아무도 없는데도 말이다.
낯선 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화음으로 들리기까지, 아마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처음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분명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소리에 조금씩 귀가 트이자, 이제는 그 소리가 없는 여름밤이 오히려 허전하게 느껴진다. 낯선 것은 처음엔 소음처럼 들리지만, 함께 지내다 보면 어느새 우리 삶의 배경음이 된다. 어쩌면 환대란 그런 것이 아닐까. 처음엔 불편하고 낯설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익숙해지고, 결국엔 없어서는 안 될 소리가 되는 것.
풀벌레들은 이 아파트를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를 나누어 썼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단지는 그들 덕분에 비로소 살아있는 곳이 되었다. 사람 사는 동네도 마찬가지 아닐까. 누군가 새로 온다고 해서 내 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낯선 존재로 인해 이 동네는, 이 슬롯는 더 풍성한 소리를 내게 된다.
오늘 밤에도 창문을 열어둔다. 귀뚜라미 소리가 방 안 가득 퍼진다.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저 반가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