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이 그립다
주말이다.
짧고 소중한 주말.
나는 일주일 동안 밀린 빨래를 돌린다.
일주일 동안 세상의 때에 찌든 나의 정신도 같이 돌려버리고 싶다.
♪라 라라라 라~ 라~ 라라라 라라라 라~ 라~♬
(엘지 가전제품 종료 소리)
나는 빨래를 꺼냈다.
여기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휴 다행이다. 평범한 일상이다.
평범한 일상이 왜 다행인가?
일상은 원래 평범한 법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요새 평범한 일상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 학계 권위자들의 이론이다.
엘리베이터가 늦게 오면 기다림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당연해지고,
휴대전화 배터리가 3퍼센트 남으면 부족함 속에서도 감사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궁민의 의무이며,
횡단보도 앞에서 빨간불을 만나면 잠시 멈추는 것도 삶의 일부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현대인의 미덕이라는 것이다.
택배 상자를 뜯는 것도 위험하다.
겹겹이 붙은 테이프를 벗기며 문득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마음을 겹겹이 포장한 채 살아가는가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은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무지성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쨌거나 택배는 뜯고 보자.
왜냐면 그 안에 세제가 들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어언 10여 년 전.
이는 대한민국에 온라인카지노스토리(不蘭齒水土利)라는 글쓰기 플랫폼이 만들어졌을 때와 겹친다.
온라인카지노 덕분에 사람들은 별것 아닌 풍경 하나에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매일 보던 물건이 어느 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여 안과에 찾아가는 등
많은 사람들의 뇌와 안구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은 코로나를 겪으면서 더욱 심해졌다.
밖에 나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매일 보던 거실 벽이나 매일 먹던 김치 한 조각에도 사유하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거실 벽이나 김치와 상념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벽과 김치와 대화하는 것은 괜찮은데 벽이나 김치가 대답을 하면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 비대면 진료는 선 예약 필수)
이렇듯 세상의 모든 사소한 것들은 어느덧 너무 말을 많이 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유에는 묘한 확신이 있다.
일어난 일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웬만하면 나를 위로하고 성장시키는 방향의 의미여야 한다.
실수는 배움이 되고,
실패는 과정이 되고,
멈춤은 쉼이 되고,
헤맴은 새로운 길을 찾는 시간이 된다.
이쯤 되면 인생에 쓸모없는 일이 하나도 없다.
매우 효율적인 인생이다.
나는 어제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렸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발등만 아팠다.
그래도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하나 발견했다.
발가락 뼈는 부러지지 않았으니까.
생각은 많이 하는데, 멀리 가지를 못한다.
분명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의미를 찾기 전과 후가 똑같을 때가 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다.
결론을 너무 일찍 알기 때문이다.
의미를 찾는 일이 너무 일상화되면 이미 결론이 나와 있다.
아, 결국 나를 아껴야 한다는 거구나,
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거구나,
아, 실패해도 괜찮다는 거구나.
나는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의미는 계속 온다.
파도처럼 쓰나미처럼 한참 온다.
나는 목적지 버스정류장에 내려 서 있는데 버스기사가 창문을 열고 외친다.
아직 아니에요!
다시 타세요!
그래서 다시 탄다.
세 정거장을 더 간다.
그리고 도착한다.
근데 아까 그 정류장이다.
사유의 양은 많은데 사유의 이동거리가 짧다.
A에서 시작한다.
A에 대해 생각한다.
조금 더 아름다운 표현으로 A를 말한다.
자신의 경험을 하나 넣어 A를 설명한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A를 확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조용히 고백한다.
"어쩌면 A는, 결국 A였는지도 모른다"라고.
사실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A는 A다.
왜냐하면 그게 A의 본질이니까(오 좀 있어보인다! 이거 밑줄 쫙).
이런 일상의 의미 찾기에서 유난히 사랑받는 말들이 있다.
문득.
가만히.
비로소.
어느 순간.
돌아보니.
그리고 절대강자.
어쩌면.
‘어쩌면’은 놀라운 단어다.
아주 평범한 문장도 앞에 이것을 붙이면 갑자기 사색의 시간이 시작된다.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춰 있을 수 있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바카라갈피에 인쇄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거기서 사람들은 한 번 더 간다.
"어쩌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 시선 속에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럴듯하다.
대체로 맞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문제다.
쉬어도 괜찮다.
실패해도 괜찮다.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늦어도 괜찮다.
때로는 포기하는 것도 용기다.
지나온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대부분 맞다.
대부분의 사람이 좋아할 말이고, 누군가에게는 실제로 필요한 위로일 것이다.
하지만 맞는 말과 새로운 생각은 같은 것이 아니다.
생각은 가끔 자기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믿었던 말을 의심해 보고,
내가 내린 결론에 반대편 의자를 하나 놓아보고,
거기에 나와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을 앉혀봐야 한다.
그러면 문장이 갑자기 예쁘게 떨어지지 않는다.
‘포기해도 괜찮다’고 쓰려다가 포기하지 않아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쓰려다가 지금 당장 달리지 않으면 기회를 잃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모든 경험에는 의미가 있다’고 쓰려다가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고통도 있다는 데까지 가게 된다.
그 순간 글은 불편해진다.
처음 생각했던 결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마지막에 넣으려고 아껴두었던 멋진 한 문장도 망가진다.
어쩌면(헉)... 아니 아마도 그게 사유일 것이다.
생각하다가 내가 틀릴 수도 있는 곳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보는 것.
그런데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 도착하기 위해 모든 사건을 정렬하면 사유는 안전해진다.
너무 안전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과한 끼워 맞추기로 사건의 왜곡마저 발생한다.
요즘에는 사람이 가만히 있기가 참 어렵다.
뭔가를 겪었으면 성장해야 한다.
실패했으면 배워야 한다.
힘들었으면 단단해져야 한다.
쉬었으면 충전되어 돌아와야 한다.
길을 잃었으면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조차 ‘나에게 집중한 시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삶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어떻게든 손해보지 않고 회수하려는 것 같다.
경험을 넣으면 의미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실패를 넣었습니다 → 성장이 나왔습니다
이별을 넣었습니다 → 진정한 나를 만났습니다
방황을 넣었습니다 →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오백 원을 넣었습니다 → 커피라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경험은 그냥 경험으로 끝나도 된다.
실패했는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
쉬었는데 여전히 피곤할 수도 있다.
멀리 돌아갔는데 새로운 풍경 같은 건 못 보고 기름값만 더 들 수도 있다.
어떤 하루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냥 화요일이다.
그래도 된다.
인생이 매일 우리에게 교훈을 제공해야 할 의무는 없다.
마지막 의미가 왔다.
좋다.
처음에 등장했던 소재가 다시 나온다.
엘리베이터일 수도 있고, 빨간불일 수도 있고, 세탁기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좋다.
한 의미가 볼드체가 된다.
아주 좋다.
여기서 끝내자.
그런데 끝나지 않는다.
여기쯤 오면 이미지를 한 장 넣고 싶어진다.
아련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이미지가 좋겠다.
바다거나 창가거나, 역광이다.
가능하면 나는 뒤돌아 있어야 한다.
얼굴까지 나오면 상념의 농도가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
그 후에 오늘의 깨달음이 한 번 더 나온다.
이번에는 인용문이다.
아까 했던 말인데 조금 짧아졌다.
이번에는 정말 끝인가 싶다.
아니다.
두 문단이 더 있다.
전체를 요약하면서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처음부터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한 번 더 등장한다.
글은 오늘 세 번 죽었다.
나는 첫 번째 작별식에 참석했다.
두 번째까지는 예의상 있었다.
세 번째에는 집에 가고 싶다.
세탁물을 다 널었다.
양말 한 짝이 남았다.
예전 같았으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짝을 잃어버리는가.
혼자 남은 양말도 제 몫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짝이 없다고 해서 양말로서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진정한 완성이란 누군가와 한 쌍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니다.
세탁기 바닥을 봤다.
나머지 한 짝이 있었다.
주웠다.
손이 안 닿아서 고기 구울 때 쓰는 집게로 집어 올렸다.
오늘 나는 성장하지 않았다.
삶의 비밀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면의 목소리도 듣지 않았다.
그저 빨래를 널었고, 택배를 뜯었고,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렸고, 요구르트를 버렸다.
별것 없는 하루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걸로 충분...
아놔.
또 할 뻔했다.
그냥 여기서 끝내자.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