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이 생의 미니멀리스트가 될 때
세상은 통증을 언제나 하루빨리 도려내야 할 악(惡)이자 생을 망가뜨리는 침입자로 규정한다. 즉 고통이 없는 상태만이 온전한 삶이라는 강박은, 아픈 몸을 늘 불완전하고 패배한 상태의 모습들로 인정하고 바라보게 만든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바꾸어 보면 다른 풍경이 보인다. 만약 통증이 파도처럼 불규칙하게 몰아치며 일상을 흔들던 단계를 지나 마침내 늘 곁에 머무는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가라앉았다면, 그것은 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혹독하고 엄격한 방식으로 ‘생을 정돈하는 미니멀리스트’가 되어 찾아왔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픔은 가끔씩 밀려오는 ‘파도의 물결’처럼 늘 분주하다. 통증이 잦아들 때마다 밀린 일상을 허겁지겁 해치워야 하고, 언제 다시 덮칠지 모를 다음 파도를 경계하느라 마음의 에너지는 늘 사방으로 분산된다. 그러나 아픔이 공기처럼 늘 존재하는 고정된 배경이 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깊은 정적이 찾아온다. 쓸데없는 일에 낭비할 에너지가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때문이다. 체력의 한계선이 극도로 낮아진 몸은 가장 잔인하고 신속한 방식으로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한다. 영혼을 소모하는 무의미한 인간관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 사소한 자존심 싸움이나 헛된 야망들 모두 이 엄격한 필터 앞에서 단번에 걸러진다.
조용한 방 안을 채우는 따뜻한 차 한 잔, 영혼을 울리는 몇 줄의 문장, 가장 소중한 사람의 고요한 눈빛,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선율. 통증은 일상의 화려한 장식물들을 거칠게 뺏어가는 대신, 삶에 정말로 필요한 최소한의 빛이 무엇인지를 눈이 시리도록 선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오직 본질적인 것만이 남게 된다.
Ludwig van Beethoven (ca. 1770–1827) Sketches for Piano Trio in B-Flat Major, op. 97 (the “Archduke Trio”) 1811 / Music Divisio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for the Performing Arts, Dorothy and Lewis B. Cullman Center 육체의 불협화음을 짓누르고 탄생한 절대적 조화의 흔적.
[출처: The New York Public Library]
혹시 베토벤의 엉망진창인 악보가 아름다운 진짜 이유를 알고 있나요?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친필 악보를 보면 숨이 턱 막힌다.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음표들은 비명처럼 솟구쳐 있고, 잉크가 튀어 번진 자국과 난폭하게 빗금 쳐 지워버린 흔적들이 빼곡하다. 육체의 끊임없는 복통과 청력 소실이라는 형벌 같은 고통 속에서 펜을 쥔 손에 얼마나 강한 물리적 압박이 들어갔을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세상은 그가 고통을 ‘극복’하고 위대한 곡을 썼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 지독하고 완고한 신체적 고통이 오히려 그의 영혼을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격리하는 독방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만약 베토벤이 건강한 몸으로 빈의 화려한 사교계를 마음껏 누볐다면, 귀를 즐겁게 하는 유행가나 적당히 매끄러운 살롱 음악을 쓰며 안주했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자극하는 고통이라는 존재는 그를 안락함에 머물지 못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외부의 소리가 모두 침묵에 잠긴 심연 속에서 오직 우주의 완벽한 질서와 화성만을 소리없이 그의 영혼에 받아적게 만들었다. 육체의 불협화음이 도리어 영혼의 가장 완벽한 협화음을 이끌어낸 셈이다.
온통 하얀 캔버스 위에서는 흰색 물감의 존재를 알아챌 수 없다. 하지만 검게 물든 바탕 위에서는 아주 작은 백색 한 줄기조차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생명력으로 뿜어져 나온다. 통증이 삶의 배경으로 깔려 있다는 것은, 매일 아침 남들보다 조금 더 어두운 색조의 캔버스를 마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뜻이다. 예전처럼 가볍게 뛰거나 아무 걱정 없이 밤을 지샐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삶을 에워싼 이 어둠의 배경이 역설적이게도, 아주 사소한 일상의 기쁨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빛으로 다가온다. 통증이 잠시 가라앉은 고통의 틈새로 밀려드는 찰나의 평안은 문득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애련함과 나를 지탱하는 이의 온기 속에서 생을 재발견한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주는 이의 체온이 주는 구원 같은 감각들 모두 통증은 비록 불청객이지만 동시에 이렇듯 삶의 잔잔한 기쁨들과 거대한 감동으로 증폭시키는 잔인하고도 위대한 변조기인 셈이다. 그렇기에 이 불편한 삶의 뒷 배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만의 걸음을 걸어갔던 매 순간들은 어쩌면 그 어떤 삶보다 훨씬 더 짙고 풍요로운 색채로 가득 차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을거라 생각해본다.
By. James
https://www.nypl.org/events/exhibitions/galleries/performance/item/5431
https://youtu.be/ezRNLXBbB8Q?si=40D75qaUPTjyOT4m